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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1/8/12부터
 오늘: 38 전체: 1413552

 

기정진의 주리론

기정진(奇正鎭: 1798-1879)

자는 대중(大中), 호는 노사(蘆沙). 시호는 문간(文簡). 본관은 행주(幸州). 전라북도
순창(淳昌) 출생. 장성에서 성장하였다. 7세에 이미 성리철학(性理哲學)의 깊은 이치
를 깨우쳤고, 10세에는 경서·사서를 통독하였다. 병인양요(丙寅洋擾)가 일어나자
<병인소(丙寅疏)>를 올려 외침에 대한 방비책 6가지를 제시하고, 민족주체성의 확
립을 주장하였다. 이 소가 조정에서 높이 평가되어 동지돈녕부사(同知敦寧府事)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고향에서 담대헌(澹對軒)이라는 정사(精舍)를 짓고 많은 문
인과 함께 거처하다가 죽었다. 그는 조선 유학을 대표하는 한 사람으로 서경덕(徐敬
德)·이황(李滉)·이이(李珥)·이진상(李震相)·임성주(任聖周)와 함께 성리학의 6대가로
일컬어진다.

학문은 성리학에 대한 독자적 궁리와 사색으로 대성의 경지에 이르러 이황(李滉)·이
이(李珥) 이후 계속된 주리(主理)·주기(主氣) 논쟁을 극복, 이일분수(理一分殊)이론
에 의한 독창적인 이(理)의 철학세계를 수립하였다. 《태극도설(太極圖說)》 중 <정
(定)>자에 대한 해설인 <정자설(定字說)>과 사단칠정을 논한 《우기(偶記)》 등의
저술이 있으며, 그밖에 《노사집(22권, 1882)》과 《답문유편(答問類編, 15권, 1890)》
등이 있다.

주리론(主理論)

한국 유학사를 쓴 현상윤(玄相允)은 기정진의 유리(唯理)를 다음과 같이 논하고 있다.

「노사는 이기설(理氣說)에 대하여 주리설을 주장하였는데 이 주리설(主理說)은 다른
주리파(主理派)의 학자들이 이원적으로 이(理)를 기(氣)에 대립시켜서 생각하는 정도
의 것이 아니오 훨씬 그 정도를 높여 그는 일원적으로 이(理)와 기(氣)를 대립시키지
아니하고 기(氣)를 어디까지든지 이(理)안에 포함하는 개념으로 생각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주리파(主理派) 중에서 이채를 띠는 동시에 또 그 최고봉이 되는 것이며
또 그를 유리론자(唯理論者)라고 치하하게 되는 것이다.

19세기에 가장 뚜렷한 세 사람의 유학자(儒學者)를 든다면 노사 선생과 더불어 추사
(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1856)와 혜강(惠岡), 최한기(崔漢綺, 1803∼1879)를 들
수 있다. 이들이 거의 동시대에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학문적 성격은 서로 뚜
렷하게 다르다는 사실은 흥미를 끈다.

추사는 유학자로서의 실사구시(實事求是)를 표방한 금석학자(金石學者)로 널리 알려
졌으므로 어쩌면 후기 실학자중 에서도 누구보다도 실증주의라고 일러야 한다면 혜강
(惠岡)은 철저한 경험론자로서 성리학적 관념론과는 좋은 대조를 이룬다.

이처럼 전통적인 정주학(程朱學)에서 초탈(超脫)을 시도하던 시절에 굳이 이기(理氣)
논쟁을 정리하여 이분원융설(理分圓融說)을 내세우므로써 조선 성리학의 마지막을
장식하였다. 개신 유학을 내세우던 많은 실학자들이 거의 주기적(主氣的)경향을 지
니었던 시절에 그의 형이상적(形而上的) 주리설(主理說)은 전통 유학의 마지막 보루
로서 의미를 가졌다고 할 수 있다.

이(理)를 기(氣)에 대비할 수 없을 정도로 존귀하게 여긴다는 것은 곧 노사가 가치중립
의 태도를 벗어나 선(善)의 원리내지 선으로서의 의리를 그만큼 중요시 했다. 「4단은
선(善) 일변(一邊)이므로 이(理)로써 말하고, 7정은 선악을 겸한 것이므로 이기(理氣)
를 겸한 것이라 한다. 이기(理氣)의 글자는 선악이라는 자로 보아 무방한 것이다」 노
사집구(盧沙集口) 의 주장에 의하면 이(理)는 아예 선(善)이고, 기는 악이라는 뜻으로
그가 철저히 유리(唯理)의 철학을 견지하려 노력한 사실은 곧 그만큼 철저히 악(惡)을
피하고 선(善)내지 의리(義理)를 위하려는 의지의 결과라고 볼 수 있다.

그가 살던 19세기의 조선조의 내외적으로 급변과 충격으로 혼란이 심해가던 시기였다.
그는 내외의 현실에 결코 외면하거나 무관심 하지 않고 오히려 심각한 우려를 표명하
면서 대응책을 강구하기에 부심했다.

69세때 병인소(丙寅疏)를 통하여 당시의 시무책(時務策) 6가지를 정리하여 그의 구상
을 진술하여 조정에서 채택하도록 촉구하였다.

「문인 정치에 치우쳐 국방을 가볍게 여기게 되었다. 활도 좀먹고 화포도 쓸만한 것이
없으며, 남아있는 총도 녹이 나서 탄환 한발도 쏠 수 없는 지경이다. 이러한 무기로써
적군을 상대한다면 한 신과 백 기 같은 장수가 지휘한다고 하여도 살더미째 적에게 맡
겨 주는 결과가 될 것이다.」 계속 노사는 불타는 애국심으로 왜적의 침략을 막을 방책
을 말하였다.

그리하여 당시 의식있는 선비들은 “서울 장안의 만 개가 넘는 눈들이 전라도 장성의
눈 한 개만 못하구나!” 라며 한쪽 눈이 장애였던 기정진의 식견을 찬탄하였다.

▷ 유적지

장성군 진원면 고산리에는 노사를 주향으로 하고 그 문하의 학자들을 배향하는 사원인
고산서원(高山書院)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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