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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1/8/12부터
 오늘: 8 전체: 1413737

 

의병장 충장공 김덕령

김덕령(金德齡: 1567-1596)

조선의 의병장. 자는 경수(景樹), 시호는 충장(忠壯). 본관은
광산(光山). 광주(光州) 석저촌(石低村) 출생. 성혼(成渾)의 문
인으로 어려서부터 무예를 연마하였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형 덕홍(德弘)과 함께 담양지방에서 의병 5,000여명을 이끌고
출정하였다. 전주에서 익호장군(翼虎將軍)의 호를 받았고 1594
년 선전관에 임명되어 권율(權慄)의 휘하로 진해·고성에서 왜군
을 방어하였다. 1595년 고성에 상륙하는 왜병을 기습 격퇴하여
석저장군(石低將軍)으로 알려졌다.

1596년 도체찰사 윤근수(尹根壽)의 노비를 장살(杖殺)하여 한때
투옥되었으나 왕명으로 석방되자 이때부터 왕의 신임을 질투하
는 대신들과의 갈등이 시작되었다. 그 해 7월 이몽학(李夢鶴)의 모반을 토벌하러 출
정하였다가, 무고를 받아 고문당한 끝에 옥사하였다. 사후에 신원(伸寃)되어 병조판
서에 추증되었다.

1788년 정조 대왕은 장군께 충장공(忠將公)의 시호를 내렸으며 장군이 태어난 마을
석저촌을 충효의 고을이라하여 충효리(忠孝里)로 바꾸도록 하였다. 옥사하기 직전
억울함을 이기지 못해 지었다는 시조 <춘산곡(春山曲)>이 《김충장공유사(金忠壯
公遺事)》에 전하며, 김덕령의 전기를 소설화한 고전소설 《김덕령전》이 있다. 16
78년(숙종 4) 광주의 벽진서원(碧津書院)에 제향되었다가 이듬해 의열사(義烈祠)로
사액되었다. 충장사는 장군의 애국충절을 기리기 위하여 1975년 2월 건립되었다.   

김덕령의 문학

鉉歌不是英雄事       현가는 곧 영웅의 일이 아니니,
劍舞要須玉張遊       칼춤은 모름지기 옥장에서 추어야지.
他日洗兵歸去後       다른 날 싸움을 끝내고 돌아간 뒤에는
江湖漁釣要何求       강호에서 고기나 낚으리니, 다시 무엇을 원하랴.

 春山曲

춘산에 불이 나니 못다 핀 꽃 다 붙는다.
저 뫼 저 불은 끌 물이나 있거니와
이 몸에 내 없은 불이 나니 끌 물 없어 하노라.

▷ 전설

무등산과 충장공 김덕령장군은 떼어놓고 이야기 할 수 없다. 그만큼 무등산에는 그의
전설이 많이 담겨 있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장사로서 이름이 났고, 또한 효자로도 유명했다. 그가 10여 살 때
환벽당에서 마을 아이들과 놀다가 환벽당 처마 밑의 참새를 잡았던 이야기가 있다.
몸을 솟구쳐 환벽당 지붕에 뛰어 올라 한 손으로는 처마 끝을 잡고 한 손으로는 새집
을 더듬어 참새를 잡아내는데 눈 깜짝할 사이에 지붕을 한바퀴 다 돌았다는 전설이
있다.

또 효성이 지극했던 그는 노부모를 봉양하기 위해 동복 석교촌(지금의 화순 남면)까지
매일 하루도 빼놓지 않고 백여리 길을 왕복하면서 살찐 물고기를 잡아다가 조석반찬으
로 봉양하였다고도 한다.

취가정(醉歌亭)

충효동 환벽당에서 창계천 물길을 따라 약 2백m정도 오르면 취가정이 있다. 이곳은
충장공 김덕령장군의 외로운 넋을 기리기 위한 곳으로 그의 후손인 김만식 등이 고종
27년(1890년)에 창건했는데 1950년 6·25동란으로 소실된 것을 1955년 중건했다.

취가정이란 이름은 선조 때의 시인 석주(石洲) 권필의 꿈에 모함을 받아 29세의 나이
로 억울하게 죽은 김덕령 장군이 나타나 한맺힌 취시가(醉時歌)를 불렀다는 설화에서
연유한다.

취시가(醉時歌)

한 잔 하고 부르는 노래 한 곡조,
듣는 사람 아무도 없네.
나는 꽃이나 달에 취하고 싶지도 않고
나는 공훈을 세우고 싶지도 않아
공훈을 세운다니 이것은 뜬 구름
꽃과 달에 취하는 것 또한 뜬 구름.
한 잔 하고 부르는 노래 한 곡조,
이 노래 아는 사람 아무도 없네.
내 마음 다만 원키는 긴 칼로 밝은 임금 받들고자

此曲無人聞
我不要醉花月
我不要樹功勳
樹功勳也樹浮雲
醉花月也是浮雲
醉時歌
此曲無人知
我心只願長劍奉明君   <충장공유사>

취시가에 화답하다

지난 날 장군께서 쇠창을 잡으셨더니
장한 뜻 중도에 꺾이니 천명을 어찌하리
돌아가신 그 넋의 그지없는 눈물
분명한 한 곡조 취시가로 읊으셨네.

將軍昔日把金戈
壯志中최奈命何
地下英靈無限恨
分明一曲醉時歌  <권필>

▷ 충장사(忠壯祠)

광주광역시 북구 금곡동 1023에 그의 사우인 충장사가 있다. 이 곳에는 그가 입었던
의복도 전시하고 있으며 사우 뒤에는 묘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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