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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1/8/12부터
 오늘: 24 전체: 1428442

 

 하서 김인후의 필암서원

 ▷ 김인후(金麟厚1510-1560)   

조선 중기의 유학자·문신. 본관은 울산. 자는 후지
(厚之), 호는 하서(河西) 또는 담재(湛齋). 아버지는
참봉 영(齡)이며, 어머니는 옥천조씨(玉川趙氏)이다.  
열살 때 김안국(金安國)에게서 《소학》을 배웠고,
1531년에 성균사마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입학, 이
황(李滉) 등과 교우가 두터웠다.

1540년에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권지승문원
부정자(權知承文院副正字)에 등용되었으며, 이듬해
에 호당(湖堂)에 들어가 사가독서하고, 홍문관저작
(弘文館著作)이 되었다. 1543년에 홍문관박사 겸 세
자시강원설서·홍문관부수찬이 되어 세자 보도(輔導)
의 임을 맡았다.

특히, 기묘사화 때 죽음을 당한 제현(諸賢)의 원한을 개진하여 문신으로서
본분을 수행하였다. 그해에 부모의 봉양을 위해 옥과현감(玉果縣監)으로
나갔다. 중종이 죽자 제술관(製述官)으로 서울에 올라왔으나, 일년도 채
못되어 인종이 죽고 곧이어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병을 이유로 고향 장성
에 돌아갔다. 그 뒤 1554년까지 성균관전적·공조정랑·홍문관교리·성균관
직강 등에 제수되었으나 사직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시문에 능하여 10여권의 시문집을 남겼으나 도학에 관한 저술은 많지 않다.
그러나 성리학 이론은 유학사에 있어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데,
당시 이항(李恒)과 기대승(奇大升)사이에 논란되었던 태극음양설에 대하여
이항의 태극음양일물설(太極陰陽一物說)을 반대한 기대승에 동조하여, 인
심과 도심은 다 그 동처(動處)를 두고 이른 말임을 주장함으로써, 후일 기대
승의 주정설(主情說)형성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다.

학문은 성경(誠敬)을 주안으로 하였기 때문에 노수신(盧守愼)과 더불어 숙
흥야매잠해(夙興夜寐箴解)를 논한 것을 보면, 마음이 일신을 주재한다는 노
수신의 설을 비판하면서, 마음이 일신을 주재하지만 기(氣)가 섞여서 마음을
밖으로 잃게 되면 주재자를 잃게 되므로, 경(敬)으로써 이를 바르게 하여야
다시금 마음이 일신을 주재할 수 있게 된다고 주장하여, 이른바 주경설(主敬
說)을 내놓았다.

천문·지리·의약·산수·율력에도 정통하였다. 제자로는 정철(鄭澈)·변성온(卞成
溫)·기효간(奇孝諫)·조희문(趙希文)·오건(吳健) 등이 있으며, 1796년(정조 20)
에 문묘에 배향되었다. 장성의 필암서원, 옥과의 영귀서원(詠歸書院)에 제향
되었으며, 대광보국숭록대부 영의정 겸 영경연·홍문관·예문관·춘추관·관상감
사에 추증되었다.

저서로는 《하서집》·《주역관상편(周易觀象篇)》·《서명사천도(西銘四天圖)》
·《백련초해(百聯抄解)》 등이 있다.  

 ▷ 필암서원(筆巖書院)

필암서원은 1590년 하서 김인후(1510-1560)의 후학과 호남 유림들이 중심
이 되어 건립되었으며, 1786년 하서의 사위이자 문인인 고암 양자징(1523
-1594)을 배향하였다. 특히 필암서원은 1659년 필암이라는 사액을 받았으
며, 하서 김인후가 호남에서 유일하게 문묘에 배향된 점에서도 이 지역의
선비문화를 대표하는 유적이다.

그리 높지 않은 유민산이 뒤를 감싸고 있는 가운데 평지에 자리잡은 필암서
원은 선현에 대한 제사 공간과 교육 및 학문 수련의 공간, 그 밖에 장서 보관
기타 시설 등 조선시대 서원의 기본구조를 잘 갖추고 있다.
필암서원  은 옛 규모를 잘 간직하고 있을 뿐 아니라 보물 제 587호로 지정된
고문서(노비보, 원장선생안, 집강안, 원적 등)와 인종이 하서 김인후에게 하
사했다는 묵죽도, 하서유묵 등 60여건의 자료가 여전히 남아 있다. 1868년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958개 서원 중 47개소만 남게 되었는데 그 중 하
나였고, 일제시대나 6.25 사변 때에도 피해를 면한 서원이다.

1975년 4월 23일 사적 제242호로 지정되었다. 면적 5,821㎡. 1590년(선조 23)
김인후(金麟厚)의 학덕을 추모하기 위하여 세워졌는데, 병화(兵火)로 소실되
었다가 1624년(인조 2) 다시 세웠으며, 유생들의 소청으로 1662년(현종 3)
‘필암’이라는 사액(賜額)을 받고 1672년(현종 13) 현재의 위치로 이전하였다.

서원의 문루인 확연루(廓然樓)는 방주(方柱)를 쓴 정면 3칸, 측면 3칸, 상하
18칸의 2층와가(二層瓦家)로서 두 차례에 걸쳐 중·개수되었고, 문루의 편액
은 우암 송시열(宋時烈)의 글씨이다. 문루를 들어서면 정면 5칸, 측면 3칸,
총 15칸의 단층와가인 강당 청절당(淸節堂)이 보이는데, 이 건물에는 9칸 대
청과 좌우 3칸의 협실(夾室)이 있고, 대청에는 동춘(同春) 송준길(宋浚吉)의
편액이 있으며, 처마 밑에는 병계(屛溪) 윤봉구(尹鳳九)의 글씨로 사액된
‘筆巖書院’이라는 편액이 있다. 그 뒤편 서쪽에는 숭의재(崇義齋)가 있고,
동쪽에는 진덕재(進德齋)가 있으며, 숭의재 옆에는 3칸의 경장각(敬藏閣)
이 있어서 인종의 어필묵죽(御筆墨竹)을 소장하였다. 매년 4월에 하서 김
인후를 기리는 춘향제(春享祭)가, 9월에는 추향제(秋享祭)가 열린다.

▷ 시조

엇그네 버힌 솔이 낙락장송(落落長松) 아니런가
져근덧 두던들 동량재(棟樑材) 되리러니
어즈버 명당(明當)이 기울면 어느 남기 바티리

- 엊그제 베어버린 소나무가 곧게 자라던 큰 소나무가 아니었던가.
잠깐 그대로 두었더라면 기둥이나 대들보가 될 만한 재목이 되었르리니
아, 명당이 기울어지면 어느 나무로 버티어 내야 하는가? -

명종 2년(1547)에 일어난 정미사화(丁未士禍) 때, 목숨을 잃은 친구 임형
수(林亨秀)의 죽음에 대하여 개탄한 노래이다.

 ▷ 유적지

필암서원은 전남 장성군 황룡면 필암리에 있으며 전라남도 사적 제 242호로 지정
받았다. 장성읍에서 24번 국도를 따라 황룡강을 넘어 함평쪽으로 조금 가다보면
오른쪽으로 홍길동로가 나오고 그 길로 2km 정도 가면 필암서원이 자리하고 있다.
광주 북구 운암동 어린이대공원 중심부에는 김인후의 동상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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