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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1/8/12부터
 오늘: 38 전체: 1413552

 

 김정희와 추사체

 ▷ 김정희(金正喜 1786-1856)

자는 원춘. 호는 완당, 추사 등. 1786년
충청남도 예산에서 병조 판서 김노경의 아
들로 태어나 24세 되던 해에 청나라 연경
(燕京)에 가서 당시 이름난 학자들로부터
금석학과 실학을 배우고 돌아왔다. 이미
스승 박제가로부터 들어 연경 학예계의 동
정을 소상히 알고 있던 추사는 그의 해박한
지식과 신예한 관점에 경도된 완원(阮元)과
사제지의를 맺고 금석학에 대한 진귀품을
열람하고 많은 도서를 기증받았다. 이에 감
복한 추사는 자신의 별호를 완당(阮堂)이라
하여 사제관계를 분명히 했다. 또한 연경학
예계를 대표하는 옹방강(翁方綱)의 금석(金
石) 8만권이 소장되어 있는 석묵서루(石墨
書樓)를 방문했다. 추사의 천재성과 기백
넘치는 학구열에 감복한 옹방강은 "經術文章
海東第一"이라고 즉석에서 휘호하여 제자로
삼고 자신의 학통을 전수하려 했다.

추사는 청조 학예계의 중추들과의 인연으로 자신의 학예수련에 더욱 매진하
게 된다. 따라서 그의 학문은 경학, 사학 및 불교를 비롯한 제자백가와 천문,
지리, 음운, 산술에까지 널리 통하고 시문 서화에 능한 것은 물론 금석고증과
서화골동의 감식에도 뛰어났다. 특히 북한산 순수비를 발견하고 비의 글자를
고증하였으며 경주 무장사비 단편을 찾아내는 등 금석고증에 열중하여 1832
년(47세)에 《예당금석과안록(禮堂金石過眼錄)》을 저술하기도 했다.

그는 한때 규장각 시교·성균관 대사성을 거쳐 병조참판에까지 이르렀으나,
말년에는 옥사에 연루되어 제주도와 함경도 북청에서 12년 동안 귀양살이
를 했다.

유배지에서 만난 선승들과의 교류를 통해 선불교에도 조예를 쌓았으며, 학문
에서는 실사구시(實事求是)를 주장하였고, 서예에서는 독특한 추사체(秋史體)
를 완성시켰으며, 특히 예서 ·행서에 새 경지를 이룩하였다. 글과 그림에 능했
던 추사는 말년에 제주도 귀양을 살았었는데 그 때 그린 그림 가운데 '세한도
(歲寒圖)'는 현재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추사는 제주도 귀양길에 해남 대흥사에 머물게 된 적이 있는데 당대 유명 서예
가인 원교 이광사가 쓴 "대웅보전" 글씨를 촌스럽다고 내리게 하여 자신의 글씨
를 달았다고 한다. 그 후 9년의 귀양살이를 마치고 다시 그 절에 들렀을 때,  김
정희는 당시 자신의 판단이 틀렸다고 인정하며 다시 자신이 쓴 현판 글씨를 내
리게 하고 예전의 이광사 작품을 걸게 하였다는 일화도 있다.
저서로는 <완당집>, <금석과안록>, <실사구시설> 등이 전한다.

 ▷ 세한도(歲寒圖)

'세한도'는 김정희가 59세 때인 1844년 제주도 유배 당시 지위와 권력을 잃어
버렸는데도 사제간의 의리를 저버리지 않고 그를 찾아온 제자인 역관 이상적
(李尙迪, 1804-1865)의 인품을 소나무와 잣나무에 비유하여 그려준 것이다.
"날이 차가워진 다음에야 소나무 잣나무가 늦게 시듦을 안다(歲寒然後 知松
栢之後彫也)"라는 <논어>의 한 구절을 빌어 '세한도(歲寒圖)'라는 말을 쓰게
된 것이다. 즉, 시류나 이익만을 쫓지 않고 지조와 절개를 굳게 지켜나가는 이
상적인 선비정신을 의미한다.

허름한 집, 엉성해 보이는 구도, 휑한 허허로움의 세한도에는 잣나무와 함께
늙은 소나무와 젊은 소나무 두 그루가 그림을 채우고 있다. 소나무는 이 땅에
자라는 1천여종의 나무 중에서 문학과 예술의 소재로 가장 빈번하게 등장하
는 나무다. 소나무는 장생을 염원하는 해, 달, 구름, 산, 내, 거북, 학, 사슴, 불
로초와 더불어 우리 조상들이 늘 곁에 두고 아껴왔던 십장생이었다. 지조와
절개, 강인한 생명력과 같은 민족적 정서로 승화된 상징성을 지니고 있는 나
무이다. 추사 고택 옆에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백송이 한 그루 서 있다. 이 백
송은 나무가 하얀 색을 띄고 있는데 추사가 아버지를 따라 중국에 다녀오면
서 가지고 와 고조부의 묘소 앞에 심은 것이라고 한다.
현재의 백송은 많이 말라있지만 그 순백의 신비함은 여행객들을 오래도록
붙잡아 놓는다.

 ▷ 추사의 유배지

헌종 6년(1840) 안동 김씨와의 권력싸움에서 밀려나 제주도로 유배 가게된
추사는 초기 송계순의 집에 머물다가 몇 년 후 강도순의 집으로 이사를 하게
되는데 현재 추사적거지로 지정된 곳은 1948년 4.3항쟁때 강도순의 집이 불
에 타 없어져서 1984년 강도순의 증손의 고증에 따라 다시 지어진 곳이다.
대정읍성 동문 안쪽에 자리잡은 이곳은 기념관과 함께 초가 4채가 말끔하게
단장되어 있고, 기념관에는 시와 서화 등 작품 탁본 64점과 민구류 142점이
전시되어 있다. 제주시에서 모슬포행 버스로 50분, 서귀포에서는 40분 정도
면 도착할 수 있다.

 ▷ 추사의 생가

청남도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에서 태어 났다.
또한 추사가 쓴 백파선사비가 고창 선운사 부도밭에 세워져 있다.
        
화엄종주 백파대율사 대기대용지비
       (華嚴宗主 白坡大律師 大機大用之碑)
  
제주도 남제주군
대정읍 안성리에 있는 그의 적거지에는 추사관이 있다.                     

            <추사고택, 적거지,  백파선사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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