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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1/8/12부터
 오늘: 24 전체: 1428442

 

난초의 시인 가람 이병기

 가람(嘉藍) 이병기(李秉岐 1891∼1968)

전북 익산(益山) 여산면 출생. 시조시인이
자 국문학자, 교육자, 애란가이면서 애주가이
기도 함. 이론과 창작으로 20세기 시조 중흥에
기여하였음.
가람은 16세까지 고향 사숙(私塾)에서 한학을
공부하였다. 결혼까지 한 후, 학교공부를 생각
하여 전주공립보통학교에 편입학을 하였고,
서울의 관립한성사범 학교에 입학할 때의 나이
는 20세였다.
사범학교 재학 중 매주 일요일 2시간씩 '조선어
강습원'에 나가 주시경의 조선어 강의를 청강
하였으며 가람은 거의 독학으로 국문학연구와
시조시 창작의 새로운 경지를 이룩하였던 것이
다. 보통학교 교사를 지내면서 고문헌(古文獻)
수집과 시조연구에 몰두, 1925년 《조선문단
(朝鮮文壇)》지에 《한강을 지나며》를 발표한
것이 계기가 되어 시조시인으로 출발했다. 한편
한국고전에 대한 주석 및 연구논문을 발표하여,
국문학자로서의 자리도 굳혔다.
1926년 최초로 시조회(時調會)를 발기하고 《시조란 무엇인가》 《율격과
시조》 《시조와 그 연구》 등을 신문과 잡지에 발표하였다.

가람의 좌우명은‘후회를 하지말고 실행을 하자’였는데 그가 50여년간 꾸준히
《일기》를 쓴 것도, 78세 생애에 언제나 떳떳하여 흠결을 남기지 않은 것도
이 좌우명을 실행하였기 때문이다. 특히 일제 식민지시대에 있어서의 가람의
행적을 보아서도 그렇다.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옥고를 치루어야 했고, 이른
바 '창씨개명'에도 응하지 않았다. 임종국의《친일문학론》에 의하면 가람은
일제시대에 쓴 '시와 수필의 어느 한 편에서도 친일문장을 남기지 않은 영광된
얼굴'이라고 하였다.

1930년 한글맞춤법통일안의 제정위원, 1935년 조선어 표준어 사정위원이 되
고 1939년에 《가람시조집(嘉藍時調集)》을 발간, 《문장(文章)》지 창간호
부터 《한중록주해(恨中錄註解)》를 발표하는 등 고전연구에 정진하였다.
1942년 조선어학회(朝鮮語學會) 사건에 연루되어 일경에 피검, 함흥(咸興) 형
무소에 수감되어 l년 가까이 복역하다 1943년 가을에 기소유예로 출감한 후 귀
향하여 농사와 고문헌 연구에 몰두했다. 광복 후 상경, 미군정청 편찬과장, 서
울대학교 문리과대학 교수 등을 역임하고 각 대학에서 국문학을 강의했다.

1948년 《의유당일기(意幽堂日記)》 《근조내간집(近朝內簡集)》 등을 역주
(譯註) 간행했고, 1954년 학술원회원이 되었으며, 이 해 백철(白鐵)과 공저로
《국문학전사(國文學全史)》를 발간, 국문학사를 체계적으로 정리 분석했다.
시조시인으로서 현대적인 시풍을 확립하였고, 국문학자로서는 수많은 고전을
발굴하고 주해하는 등 큰 공을 세웠다.

저서나 역서에 <가람시조집>, <역대시조선>, <인현왕후전(仁顯王后傳)>, <의
유당일기(意幽堂日記)>, <근조내간선(近朝內簡選)>, <요로원야화기(要路院夜
話記)>, <가루지기타령>, <국문학전사(國文學全史)>, <국문학개론>, <가람문
선(嘉藍文選)>, <가람일기> 등이 있다.

 ▷ 작품

난초(蘭草) 四

빼어난 가는 잎새 굳은 듯 보드랍고
자줏빛 굵은 대공 하이햔 꽃이 벌고,
이슬은 구슬이 되어 마디마디 달렸다.

본디 그 마음은 깨끗함을 즐겨하여,
정한 모래 틈에 뿌리를 서려두고,
미진(微塵)도 가까이 않고 우로(雨露)받아 사느니라.

 ▷ 유적지

생가

전북 익산시 여산면 원수리. 지방기념물 제6호. 초가 네 채.
가람은 자신이 세가지 복을 타고난 것이라 여겼는데, '술복, 화초복, 제자복'이
그것이다. 조선 말기 선비 집안의 배치를 따라 안방과 사랑채 등을 만들었으며,
관리는 가람의 자부 윤씨부인이 하고 있다.

생가 앞에 위치하고 있으며 봉분이 따로 없이 묘비만 서 있다.

가람시비

1969년 전주 다가공원에 가람시비(詩碑)가 세워졌고 여산 남초등학교에도
시비가 세워져 '별'이 새겨져 있음

바람이 소슬도 하여 뜰앞에 나섰더니
서산 머리에 하늘은 구름을 벗어나고
산뜻한 초사흘달이 별과 함께 나오더라.

달은 넘어가고 별만 서로 반짝인다.
저 별은 뉘 별이며 내 별 또한 어느 게오.
잠자코 호올로 서서 별을 헤어 보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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