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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1/8/12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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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 정약용과 강진

 ▷ 정약용( 丁若鏞 1762 - 1836)

1762년(영조 38)-1836년(헌종2). 조선후기의 문신, 실학자, 소자는 귀농(歸農),
자는 미용(美庸). 호는 사암, 탁옹, 태수, 자
하도인, 철마산인, 다산(茶山), 당호는 여유
(與猶), 경기도 광주(지금의 양주군 조안면
능내리 소내 마재)출신. 아버지는 진주목사
재원이며, 어머니는 해남윤씨로 공재 윤두서
의 손녀이다. 4남 2녀 중 4남으로, 1836년 2
월 22일 향리에서 운명했다.

13세 때 풍천홍씨와 혼인하여 학연 학유와 사
위 윤참모를 두었다. 그의 일생은 대체로 3기
로 나눌 수 있는데, 제1기는 벼슬살이를 하던
시절이요, 제2기는 귀양살이 하던 시절이요,
제3기는 향리로 돌아와 유유자적하던 시절이
다.

22세 때 경의진사가 되어 줄곧 정조의 총애를
한몸에 받던 시절로서 암행어사, 참의, 좌우승
부지 등을 거쳤으나, 한때 금정찰방, 곡산부사
등 외직으로 좌천되기도 하였다. 정조의 지극
한 총애는 도리어 화를 자초하기도 하여 신유교육 사건에 연루되기도 했다.
16세 때에 서울에서 이가환, 이승훈 등으로부터 이익의 학문에 접하였고, 23세
때에는 이벽을 통하여 서양서적을 얻어 읽기도 하였다. 유학경전에 관한 연구
로는 내강중용강의 내강모시강의 희정당대학강의 등이 있으며, 기술적 업적으
로는 1989년 배다리의 준공과 1793년 수원성의 설계를 손꼽는다.

1791년 진산의 윤치충, 권상연의 옥 이후 천주교로 인하여 세정이 소연하던 중
1975년 주문모 신부의 변복잠입사건이 터지자, 정조는 수세에 몰린 다산을 일
시 피신시키기 위하여 병조참의에게 금정찰방으로 강등 좌천시켰다. 불과 반년
도 채 못되는 짧은 기간이기는 하지만 천주교에 깊이 젖은 금정역주민들을 회유
하여 개종시킨 허물 때문에 후일 배교자로 낙인찍히기도 하였다. 그러나 소연한
세정이 가라앉지 않고 더욱 거세지자 정조는 다시금 그를 1797년에 황해도 곡산
부사로 내보내 1799년까지 약 2년간 봉직하게 하였다. 이시절에 마과회통, 사기
찬주와 같은 잡저를 남겼다. 내직으로 다시 돌아온지, 채 1년도 못되어 1800년
6월에 정조가 죽자, 1801년 2월 책통사건으로 체포, 투옥되어 그의 득의시절은
막을 내리고 말았다.

1801년 2월 27일 출옥과 동시에 경상북도 포항 장기로 유배되니 이로써 그의 제
2기인 유배생활이 시작되었다. 그해 11월에 전라남도 강진에서 이배될 때까지
9개월간 머무르면서 고삼창고훈, 이아술, 기해방례변등의 잡저를 저술하였으나
서울로 옮기던 중 일실하여 지금은 남아 있지 않다.

                   <강진읍 입구에 서 있는 다산의 동상>
강진에 도착하자 첫발을 디딘 곳이 동문 밖 주가이다. 이공세서는 1805년 겨울까
지 약 4년간 거처하였고, 자기가 묵던 협실을 사의재라 명명하기도 하였다. 이시
절은 유배초기가 되어서 고적하던 시절로 기록되어 있으나 이 시기에 주가의 한
늙은 주모의 도움이 있었고, 1803년 봄에 때마침 만덕사 소풍길에 혜장선사를 만
나 유불상교의 기연을 맺기도 하였다. 1805년 겨울에는 주역연구자료가 담긴 경
함을 고성사로 옮겼으니. 여기에는 그를 위한 혜장선사의 깊은 배려가 스며 있었
고 이로부터 두 사람의 인연은 날로 깊어 갔다.

한편, 9개월 만에 다시금 목리 이학래 집으로 옮겨 1808년 봄 다산초당으로 옮기
게 될 때까지 약 1년 반동안 머물렀으니, 이때에 이학래로 하여금 다산역의 준공
을 맞게 한 것을 보면 경함을 다시금 목리로 옮긴 사연을 짐작 할 수 있다. 이로부
터 다산초당은 11년간에 걸쳐서 다산학의 산실이 되었다. 여기에서 <주역사전>
<상례사전><시경><춘추><논어><맹자><대학><중용><악경><경세유표><목민심
서> 등을 차례로 저술하였고, 1818년 귀양이 풀리자 고향으로 돌아와서 <흠흠신
서>와 <상서고훈> 등을 저술하여 그의 6경 4서와 1표 2서를 완결지었다.

총 500여권을 헤아리는 그의<여유당전서>는 대체로 6경4서 1표2서 시문잡저 등
3부로 분류할 수 있다.

다음으로 시문잡저를 살펴보면, 시문집 18권을 간추려도 6권은 되고 잡문은 전편
이 16권, 후편이 24편이다. 또한 잡찬목록을 보면<아방비억고>30권(미완성)이 있
고<아방강역고> 10권, <전례고> 2권 <대동수경> 2권, <소학주관> 3권, <아언각비>
3권 <마과회통> 12권, <의령> 1권 등이 있다.

 ▷ 강진과 다산의 유적

경기 남양주시 능내리(옛이름 마재)에 생가가 있고, 다산초당은 강진군 도암면
만덕리 만덕산 아래 귤동마을에 있다.

   <다산의 생가와 다성각, 다조, 다산동암, 천일각, 다산초당의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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