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ntitled

처음으로

  나의문학기행   서예감상   Site Map   제작자   E-Mail

Untitled

  ■ 고대의 남도문학

  ■ 고려의 남도문학

  ■ 조선의 남도문학[1]

  ■ 조선의 남도문학[2]

  ■ 조선의 남도문학[3]

  ■ 조선의 남도문학[4]

  ■ 조선의 남도문학[5]

  ■ 현대의 남도문학[1]

  ■ 현대의 남도문학[2]

  ■ 현대의 남도문학[3]

  ■ 현대의 남도문학[4]

  ■ 현대의 남도문학[5]

  ■ 남도 민속기행

  ■ 남도 역사기행

  ■ 남도 정자기행

  ■ 남도 사찰기행

  ■ 남도 맛기행

  ■ 남도 섬기행

  ■ 남도 산기행

  ■ 남도 강기행

  ■ 남도 공원기행

  ■ 5·18과 문학

  ■ 학습자료실

  ■ 아름다운 한글

  ■ 이달의 세시풍속

  ■ 봉사활동

  유머게시판

  자유게시판

  ■ 글 남기기

 2001/8/12부터
 오늘: 38 전체: 1413552

 

동리 신재효의 판소리

 ▷ 신재효(申在孝, 1812-1884)

본관은 평산(平山), 자는 백원(百源), 호는 동리
(桐里). 전북 고창 생. 조선 후기 판소리 사설을 집
대성하고 어려서부터 학문에 재능이 있었으며 음률
가곡, 창악, 속요에 정통했다.

아버지 광흡은 선대의 인연으로 고창에 내려와 관약
방을 하여 재산을 모아 신재효는 아버지가 마련한 기
반을 바탕으로 35세 이후에 이방을 거쳐 호장에 올랐
다.

전문적인 판소리광대가 아니면서 동리 신재효만큼 19
세기의 판소리 창단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한 인물
도 없을 것이다.

신재효는 신분상승을 꾀하면서 한시가 아닌 판소리에
서 정신세계를 찾아 판소리를 즐기는 동시에 자신의
넉넉한 재산을 이용하여 판소리 광대를 모아 생활을
돌보아주면서 판소리를 가르치기도 하고 광대를 대신하
여 양반층을 의식하면서 신재효는 사설 전면에 과감하
게 자신의 목소리를 드러내어 개작을 이루어 개작자로
서의 자신감을 표현하기도 하였다

중인 신분이기에 사회진출에 제약을 받고 지방서리에 머물면서도 풍류를 즐겼고
퇴임 후에는 동리정사를 지어 칩거하면서 김창록, 전해종, 진채선 등의 명창을
키워냈다.

또한 종래 계통없이 불려지던 판소리를 여섯마당으로 통일하고 체계를 확립했다.
입에서 입으로 전하며 제멋대로 불리던 12개의 판소리사설을 적벽가, 춘향가,
심청가, 토별가(수궁가), 박타령(흥보가), 가루지기타령(변강쇠가)의 여섯 마당
으로 정리했다. 이 여섯 마당의 판소리 중에 가루지기타령(변강쇠타령)은 너무
음탕하다고 하여 부르기를 꺼리는 바람에 그 가락이 잊혀지고 오늘날은 나머지
다섯 마당만이 전수되고 있다.

이같은 사실이 조정에 전해지자 1877년에 고종임금은 '嘉善大夫同知中樞府事
(가선대부 동지중추 부사)'를 제수하기도 했다.

신재효의 판소리사설은 인간의 희로애락을 담아 삶의 절실함, 비속함과 점잖음
등을 막힘없이 표현하여 자유분방함과 더불어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한껏 살린
뛰어난 예술장르로 평가받고 있다.

 ▷ 세계 무형문화유산 판소리

한국의 판소리가 유네스코가 선정하는 ‘인류 구전 및 무형 유산 걸작’에 선정됐다.
유네스코는 2003년 11월 7일 프랑스 파리 본부에서 한국의 중요무형문화재 제5
호인 판소리 등 28개 세계 무형 문화유산을 제2차 인류 구전 및 무형 유산 걸작으
선정하고 선포식을 가졌다.

2차 인류 유산 걸작은 18명의 세계적인 권위자로 구성된 국제 심사위원단이 유네
스코 회원국이 추천한 56개 유산을 심사해 선정했다. 유네스코는 소멸 위기에 처
한 인류 무형문화유산 보존을 위해 2001년 5월 한국의 중요무형문화재 제56호와
제1호인 종묘제례, 종묘제례악을 비롯한 19개국 19개 유산을 제1차 인류 구전 및
무형 유산 걸작으로 지정했다.

인류 걸작으로 지정된 무형유산은 올해 제32차 유네스코 총회가 채택한 무형문화
재 보호 협약이 발효되면 자동으로 ‘인류 무형 문화유산’ 목록에 등록돼 보호받는다.

 ▷ 신재효 고택으로 가는 길

전북 고창군 고창읍내의 모양성 입구에 있으며 1979년 중요민속자료 제39호로
지정되어 보존되고 있다.

당대 1천석의 부자로 국창, 명창을 길러내고 단가도 창작한 곳이다. 원래는 여러
채의 건물이 있었다 하나 현재는 한 채의 초가지붕 일자집이 남아 있을 뿐이다.

                                                                                     돌아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