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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1/8/12부터
 오늘: 38 전체: 1413552

 

매천 황현의 절명시  

  ▷ 황현((黃玹, 1855~1910)

본관은 장수(長水). 자는 운경(雲卿). 호는
매천(梅泉). 전남 광양(光陽) 출생. 시문에 능
하여 1885년(고종 22) 생원진사시에 장원하
였으나 시국의 혼란함을 개탄, 향리에 은거하
였다. 1910년(융희 4) 일제에 의해 국권피탈
이 되자 국치(國恥)를 통분하며 절명시(絶命詩)
를 남기고 음독 순국하였다.

이듬해 영 ·호남 선비들의 성금으로 《매천집
(梅泉集)》이 출간되고, 한말 풍운사(風雲史)
를 담은 《매천야록(梅泉野錄)》은 1955년 국
사편찬위원회 사료총서(史料叢書) 제1권으로
발간되어 한국 최근세사 연구에 귀중한 사료가
된다. 그 밖의 저서에 《동비기략(東匪紀略)》
이 있다. 1962년에 대한민국 건국훈장 독립장
이 추서되었다.

남아 있는 그의 유영(遺影)을 보면 매천은 지독한 근시였던 듯 도수 높은 안경
을 쓰고 갓을 썼다. 사시(斜視)기가 있었던, 그의 눈빛은 그래서 더욱 매섭게만
느껴진다. 정작 그 자신도 최익현이 세상을 떠나고 네 해 뒤인 1910년 8월,
전남 구례 월곡리의 집에서 "나라가 선비 기르기 5백 년인데 나라가 망하는 날
한 사람 죽는 자 없다면 어찌 통탄스럽지 않으랴!"하는 유시(遺詩)와 절명시(絶
命詩) 4수를 남기고 자결하였다.

그는 세종조의 명재상 황희의 후손이었으되, 인조반정 이후 몰락하여 호남지
방에서 세거한 선비의 집안이었다. 진작에 신동(神童)으로 근동에서 이름이
자자했다. 나이 스물에 청운의 뜻을 안고 서울로 올라온 매천은 당시 촉망받던
영재 이건창을 찾아가 교유하고 김택영을 비롯하여 여규형, 정만조, 이건방
등 쟁쟁한 문인들과 함께 함께했다.

고종 20년, 그의 나이 스물아홉 살 때 보거과(保擧科)에 응시하였으나 단지 시
골사람이라 하여 2등으로 밀려났고 그나마도 회시(會試, 문무과 과거의 초시
급제자가 서울에 모여서 다시 보는 복시)는 나라 형편으로 중지되고 말았다.
서른네 살 때 다시 부모의 간곡한 뜻을 따라 상경하여 생원회시(生員會試)에
응거, 당당히 장원으로 급제하였으나 갑신정변 이후 민씨 정권의 부패를 개탄
하여 벼슬길을 포기하고 구례로 내려가 칩거해 버렸다. 그리고 저술에 몰두하
였다.

허세와 위선을 극히 싫어했던 그는 완고한 지식인으로서 시세(時勢)를 읽는 안
목이 남달라 그의 직필(直筆)은 당대 '매천필하무완인(梅泉筆下無完人)'이란
평을 들을 만큼 추상 같았다.

  매천야록(梅泉野錄)   

필사본. 6권 7책. 1864년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집정으로부터 1910년 국권
피탈에 이르기까지의 47년간의 한국 최근세 사실(史實)을 기술한 편년체의 역
사책으로, 모두 황현 자신의 견문을 기록한 것이나, 끝 부분인 10년 8월 29일부
터 9월 10일 순절(殉節)할 때까지는 문인 고용주(高墉柱)가 추기(追記)한 것이
다. 원본은 권1이 상 ·하 2책으로 나누어져 있으며, 내용은 흥선대원군의 집정과
김씨세도(金氏勢道)의 몰락, 흥선대원군 집정 10년간의 여러 사건 등 혼란한 정
국과 변천하는 사회상 및 내정 ·외교의 중요한 사실을 거의 시대순으로 빠짐 없
이 기록하고 있다. 55년에는 국사편찬위원회에서 한국사료총서(韓國史料叢書)
제1로 간행하면서 황현의 자손들이 작성한 부본(副本)도 실었다.

  절명시(絶命詩)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여 황현이 8월 7일(음력) 술에 아편을 마시고 자결하면
서 남긴 칠언절구 4수. 김택영(金澤榮)이 엮은 《매천집(梅泉集)》 권 5에 수록
되어 있다. 황현은 나라가 망하면 국민된 도리로 누구나 죽어야 마땅하다고 생각
했고, 특히 사대부들이 직분을 다하지 못하여 나라를 망쳐놓고도 자책할 줄 모른
다고 통탄했다. 그는 인간 양심의 각성을 외치면서 양지(良知)에 순명(殉名)해
온 강화학파(江華學派)의 한 사람이다.

절명시 제1수에서 그는 이미 을사년부터 순명을 결심했다고 했고, 제2수에서 나
라의 종언을 고하는 양국조서(讓國詔書)이지만 옥음(玉音)은 다시 없을 것이라며
슬퍼했다. 제3수는 식자인(識字人)으로서의 자책을 드러냈으며, 제4수는 충(忠)
을 다하기 위해 죽는 것이 아니라 인(仁)을 이루기 위함이며, 적을 탄핵하다가 참
형당하지 못하고 죽으니 서운하다고 했다.

                   < 절명시 제 3수 >

鳥獸哀鳴海岳嚬(조수애명해악빈)   새 짐승도 슬피 울고 강산도 찡그리네.
槿花世界已沈淪(근화세계이침륜)   무궁화 온 세상이 이젠 망해 버렸어라.
秋燈掩卷懷千古(추등엄권회천고)   가을 등불 아래 책 덮고 지난날 생각하니,
難作人間識字人(난작인간식자인)   인간 세상에 식자 노릇하기 어렵기만 하구나.

  매천사(梅泉祠)

전라남도 구례군 광의면 수월리 월곡마을. 천은사 가는 길 왼편에 있음.

                           <매천사와   매천유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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