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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1/8/12부터
 오늘: 38 전체: 1413552

 

 어사 박문수전

 ▷ 박문수(朴文秀: 1691∼1756)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고령(高靈). 자는 성보
(成甫), 호는 기은(耆隱). 시호는 충헌(忠憲)이다.
이조판서 장원(長遠)의 증손이고, 세마(洗馬) 선(銑)
의 손자로, 영은군(靈恩君) 항한(恒漢)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공조참판 이세필(李世弼)의 딸이다.

1723년(경종 3)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로 급제
하여 예문관검열(藝文館檢閱), 세자시강원설서(世子
侍講院說書), 병조정랑에 올랐다가 1724년(영조 즉
위년) 노론이 집권할 때 삭직되었다.

1727년 정미환국으로 소론이 기용되자 사서(司書)에 등용되었으며,
영남암행어사로 나가 부정한 관리들을 적발하였고, 이듬해 이인좌
(李麟佐)의 난이 일어나자 오명항(吳命恒)의 종사관으로 출전, 전공
을 세워 경상도관찰사에 발탁되었다.

1730년 대사성·대사간·도승지를 역임하였으며, 충청도에 암행어사로
나아가 기민(饑民)의 구제에 힘썼다.

1732년 선혜청당상(宣惠廳堂上)이 되었고, 1734년 예조참판으로 재
직중에 진주사(陳奏使)의 부사(副使)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그뒤 호
조참판을 거쳐, 1737년 도승지를 역임한 뒤 병조판서가 되었다. 이때
병조 관리들의 폐단을 없애기 위해 병조판서의 인신과 이군색(二軍色)
의 인신을 만들어줄 것을 주청하여 이를 성사시켰다.

1739년 함경도관찰사가 되었고, 1741년 어영대장(御營大將)을 역임
하였으며, 함경도에 진휼사(賑恤使)로 나아가 경상도의 곡식 1만섬을
실어다 기민을 구제하여 송덕비가 세워졌다.

다음해 병조판서로 재직시 지리적 여건으로 봉군(烽軍)의 충원이 어
려운 북도(北道)에 각 지방에 정배(定配)된 봉무사(烽武士)로서 변통
할 것을 주청하여 이를 시행하게 하였다.

1750년 수어사(守禦使)를 역임한 뒤 영남균세사(嶺南均稅使)를 거쳐,
지성균관사(知成均館事)·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세손사부(世孫師傅)
등을 지냈고, 1751년 예조판서가 되었다. 1752년 왕세손이 죽자 내의
원제조(內醫院提調)로 책임을 추궁당하여 제주에 안치되었다.

     <어사 박문수 공적비>
이듬해 풀려나와 우참찬에 올랐다.
정치적으로 소론에 속하였으며, 영
조대의 탕평책(蕩平策)이 실시될 때
명문벌열(名門閥閱) 중심의 인사
정책에서 벗어날 것을 주장하고, 4색
(四色)의 인재를 고루 등용하는 탕
평책을 강조하였다. 특히, 군정(軍政)
과 세정(稅政)에 밝아 당시 국정의 개
혁논의에 중요한 몫을 다하였다.

1749년 영조에게 주청하여 다른 신하
들과 함께 《탁지정례 度支定例》를
출판하였는데, 이것은 《각전각궁공
상정례 各殿各宮供上定例》 6권,
《국혼정례 國婚定例》 2권, 《각사정
례 各司定例》 12권, 《상방정례 尙方
定例》 3권을 합한 것이다.

글씨로는 안성의 《오명항토적송공비
吳命恒討賊頌功碑》가 전한다.
한편, 설화로서 그가 암행어사로 활약하였던 행적이 많이 전해지고 있다.
사후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박문수의 필적>

 ▷ 어사 박문수전

인물설화의 하나로 조선 후기 영조 때의 암행어사로 유명했던 박문수에
관한 인물전설이다. 문헌설화는 <기문설화> 2편, <계서야담> 1편, <청
구야담> 3편, <선언편> 2편, <동야휘집> 2편, <대동기문> 등에 각각 전
하며, 구전설화는 전국적인 분포를 보이면서 자료도 풍부하고 유형도
다양하다. 민중들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고 있는 대표적인 인물전설의
하나이다. 문헌설화는 ① 박문수의 중매담, ② 박문수와 물 긷는 여종,
③ 박문수의 등과의 세가지 유형으로 나뉜다. <기문총화> <청구야담>
<선언편> <동야휘집>에 실려 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박문수가 등과하기 전에 진주책방에 있을 때 한 기생과 사귀어 정이 깊
었다. 그 무렵 관청에 박색이라 늙도록 시집을 못 간 물 긷는 종이 있었
는데, 그 여자에게 남녀의 정을 알게 하는 사람은 큰 복을 받을 것이라는
얘기를 듣고, 박문수가 측은히 여겨 계집종을 불러 동침하였다.

나중에 박문수가 서울에 가서 응과하여 암행어사가 되어 내려오니, 기생
은 초라한 행색을 보고 박대하였으나, 종은 지성껏 대접했을 뿐 아니라
오랫동안 박문수의 성공을 축수하고 있었다 한다. 그 사실을 안 박문수
는 감격하였다. 이튿날 사또가 베푼 잔치에 가서 좌중의 멸시를 받고서
어사출두를 외쳐 관리들을 징치한 뒤, 기생에게는 벌을 주고 그 여종에
게는 상금을 주었다.  

박문수 이야기는 모든 박문수의 실제적인 행적과 관련된 것은 아니다.
다만 박문수가 몇 차례 암행어사 노릇을 하면서 잘 알려진 인물이었기
때문에 이전부터 전해 내려오던 암행어사에 관한 이야기가 모두 박문수
이야기로 수용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또한 박문수이야기는 개화기에 쓰
여진 소설 <박문수전>형성에 영향을 끼쳤다.

<박문수전>에는 3편의 이야기가 실려 있는데, 그 중 제 1회 '무주구천동순
행'은 <박문수설화>의 기록이다. 같은 시기에 지어진 <삼쾌정>은 주인공의
이름이 박문수가 아니고 박성수로 되어 있지만, 민간에서는 그것을 박문수
이야기로 인식하고 있다. 실제로 <삼쾌정>에 실려 있는 과거, 살인한 중, 의
형제 등 3편의 이야기는 <박문수설화>에서도 나타나고 있는 이야기들이다.
구전설화는 박문수이야기를 통하여 민중들의 기대와 좌절을 함께 표현하고
있어, 보다 폭넓은 현실인식을 보여주고 있다.

 ▷ 박문수전에 나오는 무주 구천동

덕유산은 전북 무주군과 장수군, 경남 거창군과 함양군의 경계를 이루며,
2도 4군 8개에 걸쳐있는 산이다. 1975년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덕유
산 산자락을 끼고 흐르는 무주구천동계곡은 나제통문에서 덕유산 향적봉
아래까지 28km에 달하는 계곡으로, 이 계곡에는 33경이 곳곳에 산재해 있다.

구천동계곡의 '구천동(九千洞)'이란 이름의 유래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
이 전해지고 있다. 옛날 덕유산에 9천 명에 이르는 성불공자(成佛功者)가
살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란 설이 있고, <박문수전(朴文秀傳)>에 의하면
이 골짜기에 '구씨(具氏)'와 천씨(千氏)가 살며 집안 싸움을 하는 것을 어사
박문수가 해결해 준 뒤로부터 '구천동(具千洞)'이라 불리다가 지금의 구천동
(九千洞)으로 바뀌었다는 설 등이 있다.

                         <덕유산과 구천동계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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