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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1/8/12부터
 오늘: 41 전체: 1428723

 

새야새야 파랑새야

 ▷ 녹두장군 전봉준(全琫準, 1854~1895)  

초명 명숙(明叔), 별명 녹두장군(綠豆將軍). 전라북
도 정읍 출생. 아버지가 민란의 주모자로 처형된 후부
터 사회개혁에 대한 뜻을 품게 되었다.
30여 세에 동학에 입교하여 고부접주(古阜接主)로
임명되고 은거 중인 흥선대원군과도 접촉하여 국정개
혁에 대한 의견을 교환하였다.

1892년(고종 29) 고부군수로 부임한 조병갑(趙秉甲)이
농민들로부터 과중한 세금을 징수하고 양민의 재산을
갈취하는 등 탐학(貪虐)을 자행하고 만석보(萬石洑) 밑
에 다시 보를 축조, 불법으로 700섬의 수세(水稅)를 징
수하였다. 이에 농민 대표와 함께 그 시정(是正)을 진정
했으나 거부당하자 1894년 1월 1,000여 명의 농민과 동학교도를 이끌고 관아(官
衙)를 습격, 무기를 탈취하여 강탈당했던 세곡(稅穀)을 농민에게 배분하고 부패
한 관원들을 감금하였다. 이 보고를 받은 정부는 조병갑 등 부패한 관리를 처벌
하고 이용태(李容泰)를 안핵사로 보내어 사태를 조사·수습케 했으나 민란의 책
임을 동학교도에게 돌려 체포·투옥·살해하고 가옥을 파괴하는 등 동학교도 탄압
과 탐학을 자행하였다.
이윽고 보국안민(輔國安民)의
슬로건을 내세우고 인근 각지의
동학접주들에게 통문을 보내어
궐기를 호소하였다. 고부에 인접
한 태인(泰仁)·무장(茂長)·금구(金
溝)·정읍(井邑)·부안(扶安) 등지의
동학교도와 농민들이 봉기, 8,000
여 명이 고부 백산(白山)에 모여
제폭구민(除暴救民)·진멸권귀(盡
滅權貴)·축멸왜이(逐滅倭夷)를 내
세우고 금구·부안을 점령, 전주를
향해 진격 중 황토현(黃土峴)에서
관군을 격파하고 계속 정읍·고창·무장 등을 장악, 4월 28일 전주를 점령하였다.

그러나 정부의 요청으로 청군(淸軍)이 인천에 상륙하고 동시에 톈진조약[天津
條約]을 빙자하여 일군(日軍)도 입국하여 국가운명이 위태롭게 되자, 양호초토
사(兩湖招討使) 홍계훈(洪啓薰)의 선무(宣撫)에 응하기로 결정하고 탐관오리의
응징, 노비의 해방, 토지균분제 실시 등 12개 조목의 시정개혁(施政改革)에 대한
확약을 받고 휴전을 성립시켰다.

그리고 전라도 지방에 집강소(執綱所)를 설치하여 동학의 조직강화에 힘쓰고 도
정(道政)에 참여, 감시하였으나 근본적인 시정개혁이 실현되지 않아 재궐기를
계획하던 중 일본이 청일전쟁에서의 우세를 이용하여 침략행위를 노골화하자
이에 격분, 재봉기하였다. 전봉준은 남도접주(南道接主)로 12만의 병력을 지휘,
북도접주(北道接主) 손병희(孫秉熙)의 10만과 연합하여 교주(敎主) 최시형(崔時
亨)의 총지휘하에 항일구국(抗日救國)의 대일전(對日戰)을 시작했다. 한때는 중
부·남부 전역과 함남·평남까지 항쟁규모가 확대되었으나 관군과 일본군의 반격
으로 패배를 거듭하였으며 공주(公州)에서 일본군과의 대격전 끝에 대패(大敗)
하고 10월 금구싸움을 끝으로 종식되었다.

전봉준은 순창(淳昌)에 피신, 동지 손화중(孫化仲)·김덕명(金德明)·최경선(崔慶善)
등과 재거(再擧)를 모의하던 중 붙잡혀 서울로 압송되어 동지들과 함께 1895년
3월 사형당하였다.

  녹두장군이라 불리는 이유

출생지에 대하여는 여러 설이 있으나, 고부군 궁동면 양교리(宮洞面陽橋里: 지금
의 정읍시 이평면 장내리)라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고부군 향교의 장의(掌議)를
지낸 창혁(彰爀 혹은 承)의 아들이다. 그는 체구가 작았기 때문에 흔히 녹두(綠豆)
라 불렸고, 뒷날 녹두장군의 별명이 생겼다고 전한다.

민요 <새야 새야 파랑새야>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녹두나무 앉지 마라.
 녹두꽃이 떨어지면 청포장수 울고 간다.
 새야 새야 파랑새야 전주고부 녹두새야
 어서 바삐 날아가라 댓잎솔잎 푸르다고

이 민요는 일반적으로 동학농민운동과 관련지어 녹두꽃은 녹두장군 전봉준을,
청포장수는 민중을 의미한다고 본다

 ▷ 유적지

전봉준장군 생가는 전라북도 정읍시 이평면 장내리에 있으며
사적 제293호로 지정되어 있다.

  <생가, 만석보유적지, 황토현기념관, 전적비, 말목장터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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