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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1/8/12부터
 오늘: 8 전체: 1413737

 

 서정인의 달궁

 ▷ 서정인(徐廷仁: 1936.12.20-)  

1936년 전라남도 순천 출생. 1955년 순천고
등학교를 졸업한 후 서울대 영문과 졸업. 1968
년부터 전북대학교에서 영문학 강의를 시작했
으며 미국 하버드대, 털사대에서 유학했다. 19
92년 전남대학교에서 문학박사학위를 취득했다.

1962년 《사상계》 신인작품 공모에 <후송>이
당선되어 등단하였으며 개성적인 문체와 치밀
한 구성이 돋보이는 소설작법으로 단편소설의
전범을 보여준 작가이며 이청준(李淸俊), 김승
옥(金承鈺) 박태순(朴泰洵) 등과 함께 1960년대
를 대표하는 작가로서 문학사적 중요성을 인정
받았다. 그의 소설은 야단스럽게 드러나지 않으
면서도 단단한 주제 의식, 치밀하고 엄정한 문체,
빈틈 없는 구성, 단 몇 줄로도 선명하게 작중 인물을 떠올리게 하는 성격 묘
사, 재치있게 구사되는 대화 등 어느 것 하나 가감을 할 것 없을 정도로 단편
소설 미학의 모범을 보이고 있다. 전개에 의한 줄거리보다는 작가 특유의
절제미를 갖춘 독특한 문체로 소설의 분위기를 주도했던 초기작품들과는
달리 후기작품들에서는 현실적 문제를 구체화함으로써 점차 관용과 해학이
깃들인 인간적 교감을 그려내는 변화를 보여준다. 특히 <달궁>은 1980년대
의 현실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형식미를 지닌 실험적인 소설로서, 86개에 이
르는 에피소드로 구성되어 있으며, 판소리어투를 현대소설에 접목시킨 독
특한 문체로 주목받았다.

등단 이래 40여 년 동안 꾸준한 작품활동을 통해 새로운 소설기법을 추구해
온 작가의 작품세계는 경박한 이 시대에 사유의 깊이를 느끼게 해주는 개성
적인 문학적 성과를 거둔 것으로 평가된다. 한국문학작가상(1976) 월탄문학
상(1983) 한국일보문학상(1986) 동서문학상(1995) 김동리문학상(1998) 대
산문학상(1999) 이산문학상(2002) 등을 수상했다.

작품집으로는 《강》(1976) 《가위》(1977) 《토요일과 금요일 사이》(1980)
《벌판》(1984) 《철쭉제》(1986) 《해바라기》(1992) 《붕어》(1994) 《베
네치아에서 만난 사람》(1999) 등이 있고, 장편소설 《달궁》(1987) 《달궁
둘》(1988) 《달궁 셋》(1990) 《봄꽃 가을열매》(1991) 《용병대장》(2000)
등이 있다.    

 ▷ 달궁    

'달궁'은 인실이란 여인의 삶을 중심으로 펼쳐진다. 그러나 그녀의 삶은 소설
의 내용 중 일부분이고 그보다 더 많은 분량은 여러 인물들의 삶의 모습을 그
리고 있다. 작가는 인실이의 삶에 관련된 많은 등장 인물들의 삶을 인실이의
삶에 종속시키지 않고 각각 독립시켜, 그리고 거의 동등한 비중으로 펼쳐 보
인다. 따라서, '달궁'의 줄거리 요약은 어렵다. 줄거리가 없기 때문이 아니라
줄거리가 너무 많기 때문이다. 실례로, 소설의 서두에 '네거리'란 제목 아래
한 여자의 죽음이 나온다. 그러나 곧 이어 '모래밭'이란 제목으로 두 처녀를
태워 주는 운전사의 이야기가 이어지고, '등장가'에서는 어느 여자의 넋두리
가 나온다. 타에 탔던 두 처녀의 이야기가 '만리포'란 제목 속에, '다시 네거리'
란 제목 아래 교통 사고를 처리하는 순경과 이 길을 지나가다 호기심을 보이는
운전사의 대화가 나온다. 독자들은 한참 후에야, 운전사는 지방 검사이고, 그
검사는 두 처녀가 타기 전에 또 다른 여인을 자신의 승용차에 태워 주었으며,
그 여인은 횟집 여자이며, 여인이 죽기 전날 밤에 검사가 그 횟집에 들렀고,
검사는 교통 사고 소식을 듣고 병원에 갔는데 죽은 여자가 자신이 태워다 준
여인임을 확인한다. 그렇다고 운전사, 즉 검사를 비롯한 두 처녀가 인실의 생
애에 종속적으로 얽히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들의 삶은 에피소드가 계속될수
록 뚜렷하게 드러나면서 독립된 줄거리를 형성한다.

  <달궁 가는 길-서정인의 문학세계>
    이종민(전북대교수)가 엮은 책

1980년대 현실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독특한 형식미를 지닌 소설로서, '달궁'은
전통적인 소설 구성 방식과는 다르다. 비록 '인실'이라는 한 여인의 삶과 직, 간
접으로 닿아 있기는 하지만, 77개의 에피소드들은 30여 명 에 이르는 인물들을
독립된 삶을 보여 주 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70여 명에 이르는 등장 인물
들이 각각 독특한 성격을 지니고 독자들 앞에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익명성이
강한, 우리 시대의 평범한 장삼이사(張三李四)일 뿐이다.

이 작품은 1985년 9월 '한국 문학'에 그 첫 번째 묶음이 발표된 이후 '세계의 문
학', '문학 사상', '소설 문학' 등 여러 문예지와 종합지를 통해 1989년 12월가지
발표되었으며, 그 첫 권 '달궁'이 1987년에, '달궁 둘'이 1987년에 '민음사'에서
단행본으로 간행된 연작 소설이다. 어찌 보면 아직도 끝나지 않은 소설이라 할
수 있다. 연작 소설이라고는 하지만 형식이 특이하다. 이 작품은 소제목이 붙은
수많은 부분들의 집합인데 각 부분은 200자 원고지 10매에서 15매 정도이다.
처음 간행된 단행본 '달궁'의 경우 86개의 에피소드들의 집합이다.  따라서, '달
궁'은 선적이고 인과적인 줄거리가 없다. 여러 개의 독자적인 줄거리를 조각 내
고 또 몇 겹으로 겹쳐서 보여 주고 있을 뿐이다. 뿐만 아니라, 줄거리 자체를 약
화시킨다. 즉, 그 역할을 최소화하여 독자들이 겨우 윤곽만 감지하도록 한다.

'달궁'은 지리산 속의 지명이다. 소설 '달궁'은 그 달궁에서의 삶의 터전을 빼앗
긴 인실이란 여자가 세상으로 내려와 헤매는 이야기가 많은 삽화들과 뒤얽혀
있다. 그 무식한 중년 여자의 삶은 쫓겨난 자의 삶이지만, 세상의 부조리, 우스
꽝스러움, 뒤틀림과 맞서 있는 힘센 모습이다. 교육이나 제도에 의해서 훼손되
지 않은 그 무식한 여자의 '싱싱한' 시각을 통해서 당연한 것으로 행세하는 많은
것들이 결코 당연하지 않음이 드러난다. 그러므로 이 소설의 공식적인 주인공은
'인실'이라는 여인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주인공의 역할을 하지 않고 다만 소설
의 중심이 되어줄 뿐이다. '달궁'의 주인공은 등장 인물 모두이다. 그들 대부분이
익명적 성격을 띠며 게다가 인실의 삶과 필연적 상관성을 갖는 것도 아니다. 그
들의 삶이 인실의 삶을 보조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삶이 독립적으로 그려진다.
이와 관련해서 돋보이는 것이 시점의 자유로운 변화와 요설적인 문체이다. 이를
통해 작가는 소설이 매우 자유롭게 '열린 형식'임을 실감케 한다.

                           <지리산 달궁계곡과 서정인-전라도닷컴>

 ▷ 작가의 말

왜 쓰냐?
그러고 보니 나는 지금까지 내가 왜 글을 쓰는지 별로 생각하지 않은 것 같다.
그런 질문을 스스로 하거나 받은 적이 아마 없었다. 있었더라도 심각하게 고려
하지 않은 듯하다.
나는 그 동안 그저 글을 써왔다. 이것은 왜 글을 쓰느냐에 대한 대답에 중요한
열쇠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문학의, 또는 예술의 무목적성이나 자목적
성과도 관련이 있다.

글쓰기에 대한 질문들 중에서 넷은 비교적 쉽게 대답할 수 있다. 누가 쓰냐?
내가 쓴다. 언제 쓰냐? 살아있는 동안 쓴다. 어디서 쓰냐? 내가 사는 곳에서
쓴다. 무엇을 쓰냐? 내게 일어난 일들과 내가 보고 듣고 느끼고 읽고 생각한
것을 쓴다.
나머지 둘은 서로 다른 점에서 대답하기 힘들다. 어떻게 쓰냐? 이것은 나의 평
생 문제다. 쓰기는 항상 새로운 실험이다. 왜 쓰냐? 그냥 쓴다. 그냥? 무의식적
으로? 맹목적으로?
어떤 사람은 노름빚을 갚기 위해서 글을 썼다. 정적을 비난하고 교황당이나 황
제당을 지지하여 피렌체에 평화를 가져오기 위해서 글을 쓴 사람도 있었다. 공
화정의 이상을 실현한 혁명가와 그가 단두대로 보낸 왕의 아들, 둘 다를 위해서
시를 쓴 시인도 있었다.
말하자면 우남과 사일구, 둘 다를 노래한 시인과 같다. 그는 성공회를 옹호할 때
는 가톨릭을 배격했고, 로마교회로 개종한 다음에는 영국정교를 욕했다. 그는
그러기 위해서 시를 썼다. 생활비를 대준 권문세가나 왕을 위해서 글을 쓰고 또
그것을 그들에게 바치는 일은 흔했다.

돈 많은 장사치의 집에서 숙식을 하고 그를 위해서 글을 쓰는 수도 있었다. 어떤
시인은 가슴 속에서 화산이 폭발하는 것을 예방하기 위해서 시를 썼고, 어떤 여
자는 목이 잘리는 것같이 느꼈을 때 살아남기 위해서 시를 썼다.
호메로스가 장군이었다면 서사시를 썼을까? 만일 그가 유능한 군인이었더라면
희랍을 위해서 트로이를 공략하는데 공을 세우지, 집에 들어앉아서 영웅들을 노
래했을까? 물론 그가 기린 장수들은 벌써 몇 백 년 전 사람들이었다.
그는 군사적으로 유능 무능 간에, 시간적으로 그들 중의 하나가 될 수 없었다.
그러나 전쟁이란 항상 있는 것 아니냐? 그는 그의 시대의 전쟁의 용사가 될 수
있었다. 그가 그것이 안 된 것은 전쟁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것이 되는 것과 그
의 일이 별개의 것이기 때문이었다. 종군기자는 그가 취재하는 전쟁이 아니라 그
의 기사에 목숨을 건다. 보도가 뭐길래! 전장에서 산화한 기자는 그의 조국의 국
익을 위해서 죽은 것이 아니다. 사실을 알리기 위해서 목숨을 버렸다. 사실이 뭐
길래!

사실이 뭐냐? 진실이 왜 귀하냐? 진리가 왜 목숨을 걸만한 값어치가 있냐? 사물
의 참모습은 보기가 힘들다. 힘든 만큼 그것을 보면 기쁘다. 너무 눈부셔서 눈이
멀 정도다. 옛날 신의 모습을 보면 타 죽었다. 진리는 조금씩 그 편린을 본다. 그
것도 사람의 평생이 걸린다. 돌멩이 하나, 나뭇잎 하나, 개구리 한 마리 다 못 알
고 세상 뜬다.
얻기 힘든 것은 다 귀하냐? 보기 힘든 것은 다 기쁘냐? 돈은 벌기 어렵다. 그것은
금은보화와 함께 귀하다. 아름다운 여인은 흔하지 않다. 그것을 보면 즐겁다. 진
리는 왜 붙잡기 힘들고, 사물의 참모습은 왜 보기 어렵냐? 욕심에 눈이 어두우면
눈이 있으되 못 보고, 귀가 먹으면 귀가 있어도 못 듣는다. 마음을 비우면 물건의
덧없음이 보인다. 욕심을 버리기가 어렵다. 그것은 거의 인간의 조건을 포기하는
것과 같다. 처자식을 먹여 살려야 하고, 비바람을 피하고, 목마름과 배고픔을 달
래야 하는데, 어떻게 그것들을 가능하게 해주는 돈을 돌보듯 할 수 있으랴. 도둑
질하지 않고도 기본필요를 충족할 수 있는 사람들은 마음 비우기가 쉬워서 좋겠
다고도 생각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은 경우가 더 많다. 그들에게는 편익과 사치
가 기다리고, 편하고 호화롭게 사는 사람들에게는 더 큰 편리와 호사가 항상 기다
리고 있다.

주린 배를 채우고 벗은 몸을 바람 이슬 피하려고 저지르는 도둑질보다 자동차 타
고 술 먹고 계집질하고 노름하고 명품 사재기하고 큰집 장만하고 공치기 하려고
하는 도둑질이 단연 더 다. 가난 구제는 나라도 못한다고 하지만 거짓말이다. 조
막만한 위장 채우는 데는 그리 많은 돈이 안 든다. 먹기 전의 도둑질은 생존권이
다. 먹은 다음의 도둑질은 무엇이냐? 그것도 용서해야 하냐?
돈이 사람의 가치를 재는 척도인 우리 사회에서는 그것도 생존권이 되게 한다. 돈
이 없으면, 있어도 많이 없으면, 많이 있어도 더 많이 없으면, 사람노릇을 할 수 없
고, 사람대접을 받을 수 없다. 자본주의는 웬만큼 먹고 난 다음에도 마음 비우는 것
을 참으로 어렵게 만든다. 시인들은 더러 정박아처럼 되어 처자식은 물론 자신의
앞도 가리지 못한다. 마음을 비우려고 한 대가다.

욕심을 버리는 것이 어렵지만, 그것으로 일이 끝나지 않는다. 머리 깎고 절에 들어
가 면벽 삼년에 수도 십년 하면, 아마 도가 트여서 문학 같은 것은 안중에 없을 것
이다. 혹 있더라도, 그의 언어는 너무 엉성해서 겨우 선문답이나 게송으로 그의 뜻
을 속인들로 하여금 촌탁케 할 수 있을 뿐, 꿀먹은 벙어리처럼 온전한 통신은 불가
능할 것이다.

불완전한 언어로 진리를 붙잡으려고 하는 것은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무모한 짓이
다. 글쓰기는 많은 딴 세상살이와 마찬가지로, 완성이 아니라 끝없는 시도다. 그것
은 설명이나 해설이 아니라 탐험이고 방황이다.  
                                                                      <한국일보/2002/08/2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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