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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1/8/12부터
 오늘: 43 전체: 1428725

 

송강 정철의 가사

 ▷ 정철(鄭澈 1536∼1593)

자는 계함(季涵), 호는 송강(松江). 시호는 문청(文淸). 본관은 연일(延日). 둘째
누이가 계림군(桂林君) 유(瑠)의 부인이었는데 1545년 을사사화에 계림군이 관
련되어 그 일족으로서 아버지가 유배당할 때 유배지를 따라다녔다.

1551년(명종 6) 유배에서 풀려나자 온 가족이 고향인 전라도 창평(昌平)으로 이주
하여 김윤제(金允悌)·기대승(奇大升) 등 당대의 석학들에게 사사하였으며, 이이
(李珥)·성혼(成渾) 등과 같은 학자들과 친교를 맺었다.

1561년(명종 16) 진사시에 합격한 뒤 직강·헌납·지평을 거쳐 함경도 암행어사를
지낸 뒤 이이와 함께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다. 78년(선조 11) 승지에 올랐으나
동인(東人)의 공격을 받아 사직, 고향으로 돌아갔다.

1580년 이후 3년 동안 강원도·전라도·함경도의 관찰사를 지내면서 《관동별곡(關
東別曲)》 《훈민가(訓民歌)》 등을 지었고 1584년 대사헌이 되었으나, 다음해 사직
하고 고향으로 돌아가 《사미인곡(思美人曲)》 《속미인곡(續美人曲)》 《성산별곡
(星山別曲)》 등 수많은 가사와 단가를 지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다시 벼슬길에 나서 체찰사가 되었고, 이듬해 사은사로 명나라
에 다녀왔다. 이후 탄핵을 받아 사직, 강화 송정촌에서 만년을 보냈다.

숙종 때의 김만중(金萬重)은 《서포만필(西浦漫筆)》에서, 정철의 《사미인곡》
《속미인곡》 《관동별곡》을 중국 초(楚)나라 굴원(屈原)이 지은 《이소(離騷)》
에 비겨, <동방의 이소>라고 절찬한 바 있다.

작품은 <관동별곡> <사미인곡> <속미인곡> <성산별곡> 4편의 가사와 시조 107수
가 전한다. 저서로는 시문집인 《송강집》과 시가작품집인 《송강가사》가 있다.
창평의 송강서원(松江書院), 영일의 오천서원(烏川書院) 별사(別祠)에 제향(祭享)
되었고, 충북 진천군 문백면 봉죽리에 신도비가 세워져 있다.

 ▷ 가사

               성산별곡

엇던 디날 손이 성산(星山)의 머물며서,
서하당(棲霞堂) 식영정(息影亭) 주인아 내말 듯소,
인생 세간(世間)의 됴흔 일 하건마난
(하략)

1560년(명종 15) 작자가 25세 때 창평 지곡리 성산(전남 담양군 남면 지곡리)에서
처외재당숙(妻外再堂叔)인 김성원(金成遠)을 경모하여 그곳의 풍물을 4계절에 따
라 읊고, 서하당(棲霞堂)의 주인 김성원의 풍류도 함께 노래한 것이다.
모두 84절 169구로 되어 있으며, 내용은 서사, 춘경, 하경, 추경, 동경, 결사로 나뉜다.

                사미인곡

이 몸 삼기실 제 님을 좇아 삼기시니
한생 연분이며 하늘 모를 일이런가 
나 하나 젊어 있고 님 하나 날 괴시니
이 마음 이 사랑 견줄 데 노여 없다

평생에 원하요대 한데 녜자 하였더니
늙어야 무슨 일로 외오 두고 그리난고
(하략)

이 가사는 임금에 대한 간절한 충정을, 한 여인이 지아비를 사모하는 마음에 비유
하면서 자신의 뜻을 우의적(寓意的)으로 표현하였다. 제목은 《시경(詩經)》이나
《초사(楚辭)》에서 따온 것이지만 내용은 순수한 우리말을 구사한 창작이다.

모두 63절(행) 126구(句)로 이루어졌다. 전편(全篇)의 구성은 서사(緖詞), 원사
(怨詞:春怨 ·夏怨 ·秋怨 ·冬怨), 결사(結詞) 부분으로 3분할 수 있다.
이 가사의 속편인 《속미인곡(續美人曲)》과 함께 ‘전후미인곡(前後美人曲)’이라
일컬었다.

                 속미인곡

뎨 가는 뎌 각시 본 듯도 한뎌이고.
天上(천상) 白玉京(백옥경)을 엇디하야 離別(이별)하고
해 다 뎌 져믄 날의 눌을 보라 가시난고.

어와 네여이고 내 사셜 드러 보오.
내 얼굴 이 거동이 님 괴얌즉 한가마난 
엇딘디 날 보시고 네로다 녀기실새 
나도 님을 미더 군뜨디 전혀 업서
이래야 교태야 어지러이 구돗떤디
반기시 낯비치 녜와 엇디 다라신고.
누어 생각하고 니러 안자 혜여하니
내 몸의 지은 죄 뫼가티 싸혀시니
하날히라 원망하며 사람이라 허믈하랴
셜워 플텨 혜니 造物(조믈)의 타시로다.
(하략)

정철이 50세 때인 1585년(선조 18) 당쟁으로 조정에서 물러나 창평(昌平)에 내려가
있는 동안에 지은 가사로, 3·4조(또는 4·4조)에 모두 49절 96구로 되어 있다.

《사미인곡》과 마찬가지로 임금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젊은 여인이 남편을 사모하는
형식으로 읊고 있으나, 그 표현 방법은 두 여인의 문답형식으로 구성하였고, 한자어구
도 훨씬 적으며, 애끓는 심정이 더욱 넘쳐흐른다.

                   관동별곡

江강湖호애 病병이 깁퍼 竹듁林님의 누엇더니,
關관東동 八팔百백 里니에 方방面면을 맛디시니,
어와 聖셩恩은이야 가디록 罔망極극하다.
延연秋츄門문 드리다라 慶경會회 南남門문 바라보며,
下하直직고 믈너나니 玉옥節졀이 알패셧다
(하략)

1580년(선조 13) 정월 작자가 45세 때 강원도 관찰사로 부임하여 내 ·외 ·해금강과 관동
팔경(關東八景) 등의 절승(絶勝)을 두루 유람한 후 그 도정과 산수 ·풍경 ·고사(故事) ·
풍속 및 자신의 소감 등을 읊은 기행가사이다.

음률이 주로 3 ·4조로 이루어진 이 가사의 용어는 비교적 순수한 우리말이 많고, 비록
한문어휘라 하더라도 대개 우리말화한 것들이다. 또한 이 가사는 파란만장한 작자의
관직생활에서 비교적 득의(得意)에 찼던 시절의 작품인 만큼 전체의 분위기가 웅장하
고 명쾌하여 화려체의 문장과 조화를 이루는 것이 특색이다. 특히 대구법(對句法)의
묘를 살리면서 감탄사를 적절하게 활용하고 생략법을 구사하는 등의 수법은 송강의
빼어난 문장의 경지를 남김 없이 보여준다
.

 ▷ 시조

                     훈민가

아버님 날 나흐시고 어마님 날 기르시니
두분 곳 아니시면 이 몸이 사라실가.
하늘같은 가 업슨 은덕을 어데 다혀 갑사오리.

《경민가(警民歌)》라고도 한다. 16수로 되어 있으며, 작자가 1580년(선조 13)에
강원도 관찰사(觀察使)로 부임하였을 때 백성들로 하여금 도덕을 깨치게 하기 위
하여 지은 작품으로서, 삼강오륜(三綱五倫)의 유교적 윤리가 그 내용이다.

                    장진주사

한 잔盞 먹새근여 또 한 잔盞 먹새근여.
곳 것거 산算노코 무진무진 먹새근여.
이 몸 즈근 후면 지게 우희 거적 더퍼 주리혀 매여 가나
유소보장의 만인이 우러 네나
어욱새 속새 덥가나무 백양 수페 가기곳 가면
누른 해 흰 달 가는 비 굴근 눈 쇼쇼리 바람불 제
뉘 한 잔盞 먹쟈 할고.
하믈며 무덤 우희 잔나비 파람 불 제 뉘우친들 엇디리.

최초의 사설시조로 보는 작품이다.
권주가(勸酒歌)로서 《송강가사(松江歌辭)》에는 〈관동별곡(關東別曲)〉 등과 함
께 배열되었으나, 《국조시강(國朝詩綱)》 《석주집별곡(石洲集別曲)》 권7에는 단
가류(短歌類)에 수록되었다.
이 노래에는 애주가로 이름 높고 또 호방하였던 작자의 성격과, 허무와 적막·애수의
정조(情調)가 서려 있다.

 ▷ 송강정과 식영정의 모습

       <송강정: 전남 담양군 고서면 원강리>

       <식영정: 전남 담양군 남면 지곡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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