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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1/8/12부터
 오늘: 41 전체: 1428723

 

 우암 송시열의 글씨바위

 ▷ 우암 송시열(宋時烈 1607-1689)   

본관 은진(恩津). 자 영보(英甫).
호 우암(尤庵)·화양동주(華陽洞主).
시호 문정(文正). 아명 성뢰(聖賚).
충청북도 옥천군(沃川郡) 구룡촌(九
龍村)에서 태어났다. 모친 곽씨(郭氏)
가 명월주(明月珠)를 삼키는 꿈을 꾸
고 임신했고, 이 때에 아버지가 공자
가 여러 제자들을 거느리고 집으로
오는 꿈을 꾸어 어릴 때의 이름을
성뢰라고 했다.

1633년(인조 11) 생원시에 장원급제
하여 최명길(崔鳴吉)의 천거로 경릉
참봉(敬陵參奉)이 되었으나 곧 사직,
1635년 봉림대군(후에 효종)의 사부
가 되었다. 이듬해 병자호란 때 왕을
호종(扈從)하여 남한산성으로 피란
하였고, 1637년 화의가 성립되자 낙
향, 1649년 효종이 보위에 오르자
장령(掌令)에 등용, 세자시강원진
선(世子侍講院進善)을 거쳐 집의(執義)가 되었으나 당시 집권당인 서인
(西人)의 청서파(淸西派)에 속한 그는 공서파(功西派)의 김자점(金自點)
이 영의정이 되자 사직하고 다시 낙향하였다. 이듬해 김자점이 파직된 뒤
진선에 재임명되었으나 1651년 그가 찬술한 《장릉지문(長陵誌文)》에
청나라 연호를 쓰지 않았다고 김자점이 청나라에 밀고함으로써 청의 압
력을 받아 사직하고 또 낙향, 충주목사(忠州牧師)·집의 등에 임명되었으
나 사양하고 후진 양성에 전심하였다. 

1658년(효종 9) 찬선에 등용, 이조판서로 승진, 효종과 함께 북벌계획을
추진하였으나 이듬해 효종이 죽자 그 계획은 중지되었다. 그 뒤 자의대비
(慈懿大妃)의 복상문제(服喪問題)가 제기되자 기년설(朞年說: 만 1년)을
주장하여 관철시키고 3년설을 주장하는 남인을 제거하여 정권을 장악,
좌참찬(左參贊) 등을 역임하면서 서인의 지도자로서의 자리를 굳혔다.
1660년(현종 1) 우찬성에 올랐을 때, 앞서 효종의 장지(葬地)를 잘못 옮
겼다는 규탄을 받고 낙향하였고, 1668년 우의정이 되었으나 좌의정 허
적(許積)과의 불화로 사직했다가 1671년 다시 우의정이 되고 이듬해
좌의정이 되었다. 

1674년 인선왕후(仁宣王后)의 별세로 다시 자의대비의 복상문제가 제기
되어 대공설(大功說: 9개월)을 주장하였으나 남인 쪽이 내세운 기년설이
채택됨으로써 실각, 제1차 복상문제 때 기년설을 채택하게 한 죄로 이듬
해 덕원(德源)으로 유배, 그 뒤 여러 곳으로 유배장소가 옮겨졌다. 1680년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으로 남인이 실각하게 되자 중추부영사(中樞府領
事)로 기용되었다가 1683년 벼슬에서 물러나 봉조하(奉朝賀)가 되었다.
이 무렵 남인에 대한 과격한 처벌을 주장한 김석주(金錫胃)를 지지함으
로써 많은 비난을 받았는데 그 중에서도 제자 윤증(尹拯)과의 감정대립
이 악화되어 마침내 서인은 윤증 등 소장파를 중심으로 한 소론(少論)과
그를 영수로 한 노장파의 노론(老論)으로 다시 분열되었다. 

그 뒤 정계에서 은퇴하고 청주 화양동에서 은거생활을 하였는데 1689년
왕세자가 책봉되자 이를 시기상조라 하여 반대하는 상소를 했다가 제주에
안치되고 이어 국문(鞠問)을 받기 위해 서울로 오는 도중 전라도 정읍(井
邑)에서 사사(賜死)되었다. 1694년 갑술옥사(甲戌獄事) 뒤에 신원(伸寃)
되었다. 그의 묘는 충청북도 괴산군 청천면 청천리에 있으며 충북 기념물
제10호로 지정됐다. 주자학(朱子學)의 대가로서 이이(李珥)의 학통을 계
승하여 기호학파(畿湖學派)의 주류를 이루었으며 이황(李滉)의 이원론적
(二元論的)인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을 배격하고 이이의 기발이승일도
설(氣發理乘一途說)을 지지, 사단칠정(四端七情)이 모두 이(理)라 하여
일원론적(一元論的) 사상을 발전시켰으며 예론(禮論)에도 밝았다. 성격
이 과격하여 정적(政敵)을 많이 가졌으나 그의 문하에서 많은 인재가 배
출되었으며 글씨에도 일가를 이루었다. 문묘(文廟)·효종묘(孝宗廟)를 비
롯하여 청주의 화양서원(華陽書院), 여주의 대로사(大老祠), 수원의 매곡
서원(梅谷書院) 등 전국 각지의 많은 서원에 배향되었다. 

저서에 《송자대전(宋子大全)》《우암집(尤庵集)》《송서습유(宋書拾遺)》
《주자대전차의(朱子大全箚疑)》《정서분류(程書分類)》 《주자어류소분
(朱子語類小分)》《논맹문의통고(論孟問義通攷)》 《심경석의(心經釋義)》
《사계선생행장(沙溪先生行狀)》 등이 있다. 

 ▷ 시조 

님이 헤오시메 나는 전혀 밋어더니
날 사랑하든 정을 뉘손데 옴기신고
처음에 뮈시든 거시면 이대도록 셜우랴.
                          <靑丘永言> 

임(임금)이 헤아려 나를 생각해주시므로 나는 깊이 믿었는데,
나를 사랑하시던 그 정을 누구에게 옮기셨는가?
처음부터 미워하시던 거라면 이렇게 서럽지는 않으리라. 

작자는 벼슬에서 자주 물러나 귀양살이를 겪는 고단한 생활을 하였는데,
그 때의 심정을 노래한 작품이다. 

1.  청산(靑山)도 절로 절로 녹수(綠水)도 절로 절로
    산 절로 수 절로 산수간에 나도 절로
    그 중에 절로 자란 몸이 늙기도 절로 하리라  

2. 늙고 병든 몸이 북향(北向)하여 우니노라
    님 향하는 마음을 뉘 아니 두리마는
    달밝고 밤 긴 적이면 나뿐인가 하노라  

3. 임이 헤오시매 나는 전혀 믿었더니
    날 사랑하던 정을 뉘 손에 옮기신고
    처음에 뮈시던 것이면 이대도록 설우랴 

 ▷ 우암 송시열 글씐바위

우암탄시암(尤岩嘆時岩)이라고도 하는 글씨바위가 완도군 보길도 백도
리에 있다.

보길도의 동쪽 끝에 있는 바위 해안에 새겨진 송시열이 남긴 글씨이다.
조선숙종(1689년)때 왕세자 책봉문제로 당파간에 논쟁이 심화되어 서
인의 거두였던 우암은 제주도 귀양길에 오른다. 그러나 배를 타고 보길
도를 지나는 도중에 심한 복통이 일어난다. 그래 잠시 이곳 해안에 머물
며 쉬다가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는 내용의 한시 한수를 남겨 놓는다.

팔십세 늙은 몸이 거치른 만리길을 가노라.
한마디 말이 어찌 큰 죄가 되어 세 번이나 쫓겨나니 신세만 궁하구나.
북녘하늘 해를 바라보며 끝없이 넓은 남쪽바다 믿고 가느니 바람뿐이네.
초구(임금이 하사한 옷)에는 옛은혜 서려 있어 감격하여 외로이 눈물 흘리네. 
 

위 시를 가로 90㎝ 세로 80㎝. 위에서 밑으로 8줄로 되어 있다. 바위에 새긴
사적지(史蹟地)로써 깍아지른 절벽에 새파란 바닷물과 섬사이의 절경은 최
고이다. 백도리에 있으며 보길도 동쪽 끝 해안이다
.

경상남도 합천의 함벽루 등 여러 곳에 송시열의 글씨가 새겨져 있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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