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ntitled

처음으로

  나의문학기행   서예감상   Site Map   제작자   E-Mail

Untitled

  ■ 고대의 남도문학

  ■ 고려의 남도문학

  ■ 조선의 남도문학[1]

  ■ 조선의 남도문학[2]

  ■ 조선의 남도문학[3]

  ■ 조선의 남도문학[4]

  ■ 조선의 남도문학[5]

  ■ 현대의 남도문학[1]

  ■ 현대의 남도문학[2]

  ■ 현대의 남도문학[3]

  ■ 현대의 남도문학[4]

  ■ 현대의 남도문학[5]

  ■ 남도 민속기행

  ■ 남도 역사기행

  ■ 남도 정자기행

  ■ 남도 사찰기행

  ■ 남도 맛기행

  ■ 남도 섬기행

  ■ 남도 산기행

  ■ 남도 강기행

  ■ 남도 공원기행

  ■ 5·18과 문학

  ■ 학습자료실

  ■ 아름다운 한글

  ■ 이달의 세시풍속

  ■ 봉사활동

  유머게시판

  자유게시판

  ■ 글 남기기

 2001/8/12부터
 오늘: 8 전체: 1413737

 

도이장가와 신숭겸

 ▷ 작품

<원문>   

主乙完乎白乎
心聞際天乙及昆
魂是去賜矣中
三烏賜敎職麻又欲
望彌阿里刺
及彼可二功臣良
久乃直隱
跡烏隱現乎賜丁

「평산신씨장절공유사(平山申氏壯節公遺事)」

<해석문>

임을 완전하게 하신
마음은 하늘 끝까지 미치고
넋은 갔지만
내려 주신 벼슬이야 또 대단했구나                           
바라다 보면 알 것이다
그 때의 두 공신이여
이미 오래 되었으나
그 자취는 지금까지 나타나는구나

이 작품은 이두식 표기로 된 8구체 향가계 고려가요이다. 1120년 예종
임금이 서경에 행차하였을 때 팔관회가 열렸는데 그 자리에서 태조 왕
건을 구출하고 전사한 개국공신 김락(金樂)과 신숭겸(申崇謙) 두 장수
를 추모하는 인형극을 보고 지은 작품이다.

 ▷ 배경설화

신숭겸의 행적을 기록한 문헌 「평
산신씨장절공유사(平山申氏壯節公遺
事)」에 그 제작 동기에 관한 소상한 기
록과 함께 작품이 전한다. 창작 경위에
관해서는 그 밖에도 「고려사」 「명신
행적(名臣行蹟)」 「대동운부군옥(大東
韻府群玉)」 등에 간략하게나마 보인다.

예종이 서경의 팔관회(八關會)에 참관
했을 때 허수아비 둘이 관복을 갖추어
입고 말에 앉아 뜰을 뛰어다녔다. 이상
히 여겨 물으니, 좌우에서 다음과 같이
그 경위를 설명하였다.

그 둘은 신숭겸과 김락으로, 태조 왕건이
견훤과 싸우다가 궁지에 몰렸
을 때 왕건을 대신해서 죽은 공신이다.
그래서 그 공을 높이고자 태조
때부터 팔관회에서 추모하는 행사를
벌였다. 태조는 그 자리에 두 공신
이 없는 것을 애석하게 여겨, 풀로 두
공신의 허수아비를 만들어 복식을 갖추고 자리에 앉게 하였다. 그랬
더니 두 공신은 술을 받아 마시기도 하고 생시와 같이 일어나서 춤을
추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설명을 듣고 예종이 감격해서 한시와 함께
이 작품을 지었다고 한다.

 ▷ 신숭겸의 묘

고려 태조 10년 대구 공산성 전투에서 견훤에게 포위되어 전세가 위급
하자 국가의 장래를 생각한 신숭겸은 태조와 갑옷을 바꿔 입고 왕건을
탈출시킨 후 어차를 타고 적진으로 돌진하였다. 후백제군은 신숭겸을
태조로 오인하여 집궁 공격하였으며, 그는 있는 힘을 다해 싸우다 장렬
하게 전사하였다. 후백제군은 왕건의 목인 줄 알고 신숭겸의 목을 베어
갔던 것이다.

그 후 태조 왕건은 신숭겸의 공을 기려 순금으로 머리를 만들어 후하게
장례를 지냈고, 금두상이 도굴될 것을 두려워하며 춘천, 구월산, 팔공산
에도 똑같은 묘를 만들게 되었다.
그것도 안심이 되지 않았던지 이 곳에 봉분을 세 개나 만들었다. 그만큼
신숭겸에 대한 사랑이 각별한 것이다. 지금도 어느 묘가 신숭겸의 봉분
인지는 알 수 없다. 이러한 신숭겸의 충성은 고려는 물론 조선 때까지
충신의 표상으로 받들어졌다. 고려 16대 예종은 신숭겸, 김낙 두 장군을
추모하기 위해 '도이장가'까지 지어냈을 정도다. 

 ▷ 유적지-덕양서원

덕양서원(德陽書院)은 전남 곡성군 목사동면 구룡리에 위치하고 있는
고려의 개국 공신 신숭겸을 배향한 사당이다. 선조 22년(1589년)에 창
건하였으나 정유재란 때 모든 건물이 불타고 선조 36년(1603)에 신실이
중수되었으며 현종 6년(1665)이전의 서원 규모로 모두 중건되었다. 이
후 1695년에 덕양이라는 사액을 받아 선현배양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
당하여 오다,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고종 5년(1868)에 철폐되었
다가 1934년 지방유림의 공의로 복원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건물은 강당, 동재인 연서재와 신실인 덕양사, 서재인 신덕재, 전사청, 그
리고 외삼문, 내삼문 등이 있다. 유적유물로는 덕양서원 건사사적비와 강
당과 연서재의 내부현판 19개가 있으며 출생지인 용산재와 함께 도지방
기념물 제56호로 지정되어 있다.

                                          <덕양서원 전경>

                                                                                       돌아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