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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1/8/12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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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천 양응정과 삼강문

양응정(梁應鼎: 1519-1581)

자는 공섭(公燮), 호는 송천(松川). 본관은 제주(濟州). 학포(學圃) 양팽손(梁彭孫)의
아들이다. 1540년(중종 35) 생원시에 장원급제를 한 뒤, 1552년(명종 7) 식년문과에
합격하여 검열(檢閱)을 지내고, 이어 사간원, 사헌부, 공조, 예조, 병조를 두루 거쳤
으나 공조좌랑으로 있을 때 김홍도(金弘度)와 함께 권신 윤원형(尹元衡)에 의하여
파직당하였다가 1560년 복직되어 65년 수찬(修撰)을 거쳐 교리, 응교와 예문관봉교.
세자대강원 보덕, 사간원 사간을 역임했다. 이어 홍문관 부제학, 승정원 좌우승지,
대사성을 지냈으며, 대사간, 사조참의를 거쳤으나 여러차례 모함에 걸려 광주 진주
목사직과 경주부윤, 의주목사 등 외직으로 옮겨 다니기도 했다.

그는 제자 정송강에게 「나는 글로 헛이름을 얻어 자칫하면 비방거리가 되는데 이것
은 유자(儒者)의 수치」라면서 「그대들은 행여 문장가가 되려하지 말라」고 타일렀
다. 또 문장가로 이름 높았던 백광성, 홍연 등의 제자들에게 「궁리의 뿌리 없이 먼저
문자에 능한 자는 있을 수 없다. 나 역시 늦게나마 그것을 깨닫고 후회하고 있으나 때
는 이미 늦었다」고 말한 적이 있다. 글 잘 쓴다고 깊은 사상 없이 함부로 붓을 날리는
일이 없도록 당부한 말이다.

송천은 그 자녀들의 교육도 훌륭하여 「크게는 삼강오상(三綱五常)에서부터 작게는
일사일물(一事一物)까지도 모두 나 자신에게 갖추어진 것으로 수행의 길에는 남녀의
다름이 없다」고 하고 충신(忠信), 신독(愼獨), 무자기(無自欺)야말로 학문의 요체이
며, 주자의 말대로 「만사불구충효외(萬事不求忠孝外)」라는 말로 자주 깨우쳐 주었
다. 이러한 가정교육이 있었기에 훗날 임난 때 그 자녀들의 충효열삼강의 본이 세워
졌으니 그 자녀들의 애국충절을 위한 고난의 자취는 양씨 삼강문(梁氏三綱門)에 정려
되어 전해지고 있다.  

또한 그는 시문(詩文)에 뛰어나 선조 때 8문장의 한 사람으로 유명하였으며, 저서에
《송천집》 《용성창수록(龍城唱酬錄)》 등이 있다.

▷ 유적지

광주광역시 광산구 박호동 산 131-1에는 정면 5칸, 측면 1칸, 맞배지붕 형태의 양씨
삼강문이 있다.

또한 송천 양응정 묘역은 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 산 아래에 제각이 있고 묘 앞에는
민병승이 찬한 신도비가 세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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