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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1/8/12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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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아 박용철

 ▷ 박용철(1904년∼1938년)

호는 용아(龍兒)
1904년 전라남도 광주 송정리 출생
1911년 광주 공립 보통학교 입학
1920년 배재 고보 자퇴
1923년 도쿄 외국어 학교 독문과 입학, 관동 대지진으로 귀국
1930년 김영랑과 시 동인지 『시문학』 창간, 편집과 재정을 맡음
1931년 종합 문예지 『문예월간』 창간
1933년 순문예지 『문학』 창간
1938년 사망
시집 : 『박용철 전집』(1939)
평론: <효과주의비평론강(效果主義批評論綱, 1931)>

 ▷ 작가의 말

[시문학] 창간에 대하여

시라는 것은 시인으로 말미암아 창조된 한낱 존재이다. 조각과 회화가 한
개의 존재인 것과 꼭같이 시나 음악도 한낱 존재이다.
우리가 거기서 받는 인상은 혹은 비애, 환희, 우수, 혹은 평온, 명정(明淨),
혹은 격렬, 숭엄 등 진실로 추상적 형용사로는 다 형용할 수 없는 그 자체수
대로의 무한수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어떠한 방향이든 시란 한낱 고처
(高處)이다.

물론 높은 데서 낮은 데로 흘러 내려온다. 시의 심경(心境)은 우리 일상생
활의 수평 정서보다 더 숭고하거나 우아하거나 더 섬세하거나 더 장대하거
나 더 격월(激越)하거나 어떻든 '더'를 요구한다. 거기서 우리에게까지 '무엇'
이 흘러 '내려와'야만 한다. ( 그 '무엇'까지를 세밀하게 규정하려면 다만 편
협에 빠지고 말 뿐이다. )

우리 평상인보다 남달리 고귀하고 예민한 심정이 더욱이 어떠한 순간에 감득
(感得)한 희귀한 심경을 표현시킨 것이 우리에게 '무엇'을 흘려주는 자양(滋養)
이 되는 좋은 시일 것이다. 여기에 감상이 창작에서 내리지 않는 중요성을 갖게
되는 것이다.

 ▷ 떠나가는 배   

나 두 야 간다.
나의 이 젊은 나이를
눈물로야 보낼거야.
나 두 야 간다.
아늑한 이 항군들 손쉽게야 버릴거야.
안개같이 물 어린 눈에도 비치나니
골짜기마다 발에 익은 묏부리 모양
주름살도 눈에 익은 아아 사랑하는 사람들
버리고 가는 이도 못잊는 마음
쫓겨가는 마음인들 무어 다를거냐.
돌아다보는 구름에는 바람이 희살짓는다
앞 대일 언덕인들 마련이나 있을거냐.
나 두 야 간다.
나의 이 젊은 나이를
눈물로야 보낼거야.
나 두 야 간다.

시문학, 문예월간 등 문예지를 주재하며 활발한 시작 활동을 전개한 박용철의
작품은 그의 의욕적인 문단 활동에 비추어 볼 때, 만족할 만한 수준이 못 된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 시는 젊은이가 암울한 일제 식민지 현실을 눈물로만 보낼 수
없다는 강변(强辯)을 담은 것으로 고향과 정든 사람들을 두고 떠나는 서글픈 심정
을 표현한 작품이다.

이 시는 1연에서 식민지 치하의 암담한 현실에서 느끼는 답답함과 그로 인해 어디
론가 떠나지 않을 수 없는 절박한 상황을 노래하고 있으며, 2연에서는 떠나야 한다
는 이성적 판단과 차마 떠날 수 없다는 감성적 행동 사이에서 겪는 고뇌와 갈등을
형상화하고 있다. 3연에서는 인생을 고해(苦海)로 인식하는 시적 화자가 자신의 처
지를 항구를 '떠나가는 배'에 비유하여 괴로운 마음을 표현하고 있다. '앞 대일 언덕'
이란 배를 정박할 항구를 뜻하는 것으로 목적지도 없이 망망대해로 떠나야 하는 괴
로운 심정을 잘 보여 주고 있다. 4연은 1연을 반복함으로써 의미의 강조를 꾀하고
있다.

시적 화자는 표면적으로는 '나두야 가련다'고 하며 미래 지향적 태도를 보이지만,
그 이면에는 고향과 사랑하는 사람을 버리고 갈 수 없다는 갈등과 고뇌가 깔려 있다.
몇 번씩이나 자신에게 '젊은 나이를 눈물로야 보낼거냐'며 강변하지만, 그 내면의
의지는 극복되지 못할 뿐 아니라 결국에는 '안개같이 물 어린 눈'을 글썽이는 인간적
나약함을 보이게 된다.

우리는 이러한 시적 화자의 모습을 통하여 일제의 수탈을 피해 고향을 등질 수밖에
없었던 당대 유랑인들의 비애와 슬픔을, 한숨과 눈물로써 세월을 보내야 했던 당시 
젊은이들의 고뇌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 용아 생가 찾는 길

지정번호 : 지방기념물 제 13 호
소유자 : 박종달
소재지 : 광주광역시 광산구 소촌동 363-1
지정일 : 1986년 2월 7일

이 집은 우리나라 현대문학 개척자의 한사람으로 초창기 시단을 빛낸 시인 용아 박용철
(1904∼1938)선생의 생가이다. 선생은 이 곳에서 새로운 문명을 소개하고 자주 독립정신
을 일깨워 주기도 하였다.

선생은 광주 공립 보통학교와 서울의 배재고등학교에서 배웠고 동경 청산학원에서 공부
하면서 김영랑과 사귀게 되었다. 졸업 후 다시 외국어학교 독문과에서 수학한 후 연희전
문학교를 수학하고 고향에 돌아와 문학활동에 전념하였다. 김영랑 ,정지용, 정인보, 변영
로 등과 문학 동인으로 활동하였으며, 1930년 「문예월간」을 창간하여 외국문학을 소개
하였다.

1931년에는 김영랑, 정지용등과 함께 순수시 전문지인 「시문학」을 발간하여 창간호에
대표작인 「떠나가는 배」「밤기차에 그대를 보내고」등을 발간 하였고, 극예술연구회의
동인으로 신극운동을 전개하였으며, 해외 시의 이론을 번역하여 소개하기도 하였다.

이 무렵 문단은 프로문학에 깊은 영향을 받았으나, 그는 김영랑등과 함께 순수시 운동을
펼쳤다. 정렬적이고 남성적인 그의 시세계는 30년대 서정시 발전에 선구적 역할을 하였다.
선생이 시를 통하여 마음을 가다듬어 곱게 바치려 한 것은 티끌없이 향 맑은 시혼의 순정
세계였다.

그러나 그는 1938년 35세의 젊은 나이에 병사하였다. 1939년 「박용철 전집」을 간행하
였는데, 서두에는 그의 대표작 「떠나가는 배」가 실려 있다. 후에 그의 아름다운 시 정신
을 기리기 위해 후배들이 광주 공원에 시비를 세워 기념하고 있다.

용아의 생가는 1970년대 새마을 사업으로 초가지붕을 시멘트 기와와 슬레이트등으로
개량하였으나 1995년 문화재 복원 사업을 실시, 다시 초가 지붕으로 복원하여 관리하고
있다. 본채와 사랑채, 행랑채, 사당, 서재등이 남아 있다. 본채는 정면 5칸 측면 2칸으로
높다란 막돌 기단 위에 세웠다. 왼쪽은 부엌이며, 중앙 2칸은 방인데, 4개로 나누어 열리는
문을 갖고 있다. 나머지 2칸은 2개로 열리는 정자 살문이다. 사랑채도 5칸인데 오른쪽부터
부엌, 방,마루의 차례로 되어 있다. 사당은 정면 3칸 , 측면 1칸의맞배지붕이다. 행랑채는
4칸으로 사랑채로 들어가는 대문이 있다.
이 집은 용아의 고조부가 지었다고 전해지나 19세기 후반에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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