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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1/8/12부터
 오늘: 24 전체: 1428442

 

 존재 위백규의 농촌시

 ▷ 위백규(魏伯珪: 1727∼1798)

본관은 장흥(長興). 자는 자화(子華). 호는 존재(存齋). 전라남도 관산읍
방촌리에서 태어났다. 1754년(영조30)에 증광 동당시에 합격하였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2세때 글을 해독하고 9세때 천관산에 올라 시를
읊어 세상사람을 놀라게 하였다. 경학에 심혈을 쏟다가 문사(文辭)만
하는 학문은 필요없다고 하여 천문·지리·율력·복서·병도·산수로부터 백
공기예(百工技藝)에 이르기까지 모두 익혀 통달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25세때 이미 거유(巨儒)로 이름을 높았으며 1764년(영조40) 38세때 동
양삼국 및 세계지도와 지지(地誌)를 기술한 『환영지』와 『고금서』,
당시 사회의 폐단을 지적하고 이의 개혁방안을 제시한 『정현신보(政弦
新譜)』를 지었다. 다음해 생원복시에 합격하였으나 벼슬에 뜻을 두기
않고 후진육성에 전력하는 한편문집에 《존재집》, 저서에 《지제지(支
提志)》 《환영지(窪瀛誌)》 《정현신보(政弦新譜)》《예설(禮說)》《경
서조대(經書條對)》《경서차록(經書箚錄)》《고금(古琴)》 《시소전기
서설(詩疏傳記序說)》 등이 있다.

1774(정조18) 68세때 호남지방의 해일로 위유사 서영보(徐榮輔)가 내려
와 공이 저술한 여러 책들을 보고 임금께 등용할 것을 소청하게 되는 다
음해 부사용(副司勇)의 군직을 내림과 함께 도백으로 하여금 그 저서를
올려 보내도록 하였다. 그러나 신병으로 부임하지 못하던 차 1796(정조
29) 또다시 선공감(線工監) 부봉사(副奉事)를 내렸지만 또한 사퇴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음해 봄 여러 차례 소명을 받고 입궐하여 당시의 폐단
을 논한 만언 상소문을 바치고 노환으로 물러나기를 청하였으나 허락되
지 않고 옥과현감(玉果縣監)에 부임되어 선정을 펴다 1798년 72세의 나
이로 세상을 떠났다.
                                <위백규의 묘소>

 ▷ 위백규의 농가 해석

서산에 아침 햇볕이 비치고 구름은 낮게 떠 있구나.
비가 온 뒤의 묵은 풀이 누구의 밭에 더 짙어졌는가?
아아! 차례가 정해진 일이니 묵은 풀을 매는 대로 매리라.

도롱이에 흠의를 걸치고 뿔이 굽은 검은 소를 몰고
고동풀을 뜯어먹게 하며 깃물가로 내려갈 때
어디서 픔진 볏심은 함께 가자 하는가

쳐 내자 쳐 내자 꽉 찬 고랑 쳐 내자
잡초를 고랑고랑마다 쳐 내자
잡초 짙은 긴 사래는 마주 잡아 쳐 내자

땀은 떨어질 대로 떨어지고 햇볕은 쬘 대로 쬔다.
맑은 바람에 옷깃을 열고 긴 휘파람 되는대로 불 때
어디서 길가는 손님은 마치 나를 아는 듯이 주저 없이 머무는가

밥그릇에는 보리밥이오 사발에는 콩잎채라
내 밥이 많을까 걱정이오, 네 반찬이 적을까 걱정이라
먹은 뒤에 한숨 잠을 자는 즐거움이 너와 내가 다르랴?

돌아가자 돌아가자 해가 지겠구나 돌아가자
시냇가에서 손발을 씻고 호미 매고 돌아올 때
어딘가에서 들리는 초동의 풀피리 소리가 함께 가자 재촉하는고.

면화는 세 다래 네 다래로 듬뿍 피고 이른 벼는 피는 이삭이 곱더라
오뉴월이 언제 갔는지 모르게 가고 벌써 칠월 중순이로다
아마도 하늘이 너희(면화, 벼)를 만드실 때 바로 나를 위해 만드셨구나.

아이는 낚시질 가고 집사람은 절이 채(겉절이 나물) 친다.
새 밥 익을 때에 새 술을 거르리라.
아마도 밥들이고(들여오고) 잔 잡을 때 호탕한 흥에 겨워하노라.

취하는 이는 늙은이요, 웃는 사람은 아이로다.
어지럽게 술잔을 돌려 탁주를 고개 숙여 권할 때에
흐르는 장고, 긴 노래에 누가 자기 차례의 춤을 사양하여 미루는가

 ▷ 장천재(長川齋)

장천재는 관산읍 방촌리 천관산 기슭에 자리하고 있다. 위백규는 어려서
이곳에서 수학하였으며, 또 후배를 양성하고 유림간에 시문을 교류하였던
장소이다. 이는 내부에 걸린 많은 시문이 적힌 현판들로도 알 수 있다. 현
재는 장흥위씨 방촌계파의 제각으로서 이용되고 있다.

이 건물은 ㄷ자형 평면으로 전면은 양쪽 날개 1칸씩을 누각형으로 만든
것이 특징이라 하겠다. 장대석으로 짜올린 기단 위에 덤벙주초를 놓고
기둥은 원주를 세웠다. 지붕은 중앙 용마루 부분이 ㄷ자형 양익부와 높
이를 동일하게 하고 전면에서는 팔작지붕으로 합각이 보이며 배면에서
는 맞배지붕으로 처리한 것이 특이하다.

                                     <장천재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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