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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1/8/12부터
 오늘: 24 전체: 1428442

 

 이성부의 벼

 ▷이성부(李盛夫: 1942.1.22-2012. 2. 28)  

광주 출신. 1960년 광주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문예
장학생으로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 입학해 19
63년 졸업했다. 1969년 한국일보사 기자로 입사해
《한국일보》 홍보부 부장, 《일간스포츠》 생활부·
사회부·문화부 부장 및 편집국 부국장 등을 지냈다.
1997년 28년간의 기자생활을 접고 《뿌리깊은 나무》
에서 2년간 편집주간으로 재직했다.

1959년 광주고등학교 재학시 《전남일보》 신춘문예
에 시 <바람>이 당선되었고, 《태광》 《순문학》의
동인으로 활동하며 김현승(金顯承)시인에게 사사받
았다. 1961-2년 《현대문학》에 시 <소모의 밤> <백
주> <열차>가 추천받아 등단했다. 이후 김현·최하림
(崔夏林)·이탄(李炭) 등과 함께 《영도(零度)》와
《시학》의 동인으로 활동했다. 1967년 시 <우리들
의 양식>이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었다. 1968년 계간지 《창작과 비평》
과 《68문학》의 동인으로 참여하는 한편, 대표적인 연작시 <전라도>를 발표하면
서 당대의 암울한 사회적 분위기를 반영하는 현실참여적인 시세계를 확립해 나갔다.

1969년 《이성부시집》으로 제15회 현대문학상을 수상했으며 1974년 두번째 시집
《우리들의 양식》을 간행했으며, 자유실천문인협의회 창립에 참여해 유신체제를
거부하는 문학인선언에 서명했다. 이어서 제3시집 《백제행》과 제4시집 《전야
(前夜)》를 발행하는 등 1970년대를 전후로 활발한 작품활동을 펼치면서 초기의
모더니즘적인 작품경향에서 벗어나 민중의 강인한 생명력과 서민의 정한을 담아
내는 사실주의적인 시세계를 구축함으로써 민중적 차원의 보편성을 획득한 것으
로 평가된다.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을 겪은 후 한동안 작품을 발표하지 못한 시인은 산행을
하면서 산을 향한 관심으로 당시의 절망과 슬픔을 삭이며 작품세계에 변화를 보
이기 시작했다. 이러한 변화는 1989년 발행한 시집 《빈산 뒤에 두고》에서부터
두드러져, 그동안 침묵했던 말문이 산에 대한 집중적인 사랑으로 표현되어 나타
났다. 이어 발행한 시집 《야간산행》에서는 초극적인 시어로 노래한 산시로서
남성적인 강인함을 보였다. 2001년 백두대간종주를 실행하기 위해 지리산을 오
르면서 집필한 시편들을 모아 ‘내가 걷는 백두대간’이라는 부제를 단 연작시집
《지리산》을 발행했다. 산행을 통해 얻은 깨달음과 자기성찰이 빛나는 연작시
81편은 시대적 반성과 문학적 회의를 거친 후 더욱 원숙해진 작가의 역량을 확인
시켜준다.

시집으로 《이성부시집》(1969), 《우리들의 양식》(1974), 《백제행》(1977),
《전야》(1981), 《빈산 뒤에 두고》(1989), 《야간산행》(1996), 《지리산》
(2001) 등이 있으며, 시선집 《깨끗한 나라》(1991), 《저 바위도 입을 열어》
(1998), 《우리 앞이 모두 길이다》(1999), 《너를 보내고)》(2001) 등이 있다.
 현대문학상(1969), 한국문학작가상(1977), 대산문학상(2001) 등을 수상했다.

 ▷ 벼

벼는 서로 어우러져
기대고 산다.
햇살 따가와질수록
깊이 익어 스스로를 아끼고
이웃들에게 저를 맡긴다.

서로가 서로의 몸을 묶어
더 튼튼해진 백성들을 보아라
죄도 없이 죄지어서 더욱 불타는
마음들을 보아라 벼가 춤출 때
벼는 소리없이 떠나간다.

벼는 가을 하늘에도
서러운 눈 씻어 맑게 다스릴 줄 알고
바람 한 점에도
제 몸의 노여움을 덮는다.
저의 가슴도 더운 줄을 안다.

벼가 떠나가며 바치는
이 넓디 넓은 사랑
쓰러지고 쓰러지고 다시 일어서서 드리는
이 피 묻은 그리움,
이 넉넉한 힘

이 시는 '벼'라는 생명 표상을 통해 민족, 민중의 공동체 의식을 나타낸 작품으로,
비유와 상징의 기법으로써 주제를 형상화시키고 있다. 일반적으로 이성부의 시에
는 분노와 사랑의 감정이 함께 담겨 있다. 분노를 담고 있다는 것은 그의 시선이
내면 세계나 자연과 같은 서정보다는 사회 현실에 더 많은 관심을 두고 있음을 알
게 한다. 그런 까닭에 그의 시는 흔히 참여시로 분류된다. 그의 시 속에는 지난 역
사 속에서 가혹하게 짓밟히고 고통받는 사람들의 삶을 껴안고자 하는 일관된 의
지가 나타나 있다. 다시 말해, 타인의 삶을 억압하고 고통스럽게 만든 역사적 현
실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나타내고 있다. 그러므로 그의 시에는 억압과 소외의
현실에 대한 고발과 함께 패배감을 극복하려는 현실 극복의 적극적인 의지가 담
겨 있다.

이 시의 핵심적 이미지인 '벼'는 공동체 의식에 바탕을 둔 민중, 민족 의식과 생
명 의지로 상징된다. 기·승·전·결의 4연 구성의 이 시는 벼의 외면적 모습, 벼의
내면적 덕성, 벼의 내면적 태도, 벼에 대한 예찬의 과정에 따라 시상을 전개시키
고 있다.

1연의 '햇살 따가워질수록 / 깊이 익어 스스로를 아끼고'라는 구절에 온갖 고난
을 이겨낸 민중의 모습이 형상화되어 있으며, '깊이 익어 스스로를 아끼고 / 이웃
들에게 저를 맡긴다'는 구절에는 겸손한 자세로 이웃과 더불어 사는 민중의 삶이
나타나 있다. 2연에서 보듯, 이러한 민중들이 '서로가 서로의 몸을 묶'었을 때, '더
튼튼해진 백성들'이 된다는 것은, 개인이 공동체가 될 때 비로소 민중의 저력이 발
휘됨을 의미한다. 그들은 아무 '죄도 없이 죄지은' 것처럼 권력에 짓밟혀 숨죽이며
살아온 사람들이다. 그렇지만 사회적 힘이 강해질 때면 그들은 바람에 흔들려 춤
을 추는 벼와 같이 가슴엔 세상을 향한 강렬한 저항의 불길이 일어나며, 자신들이
떠나야 할 때는 소리 없이 떠날 줄도 알고 있다.

3연은 2연의 부연 단락으로 민중들이 어질고 현명한 존재임을 보여 주고 있다. 하
늘로 표상된 절대자를 향하여 서러움을 달랠 줄도 알고, 시련이 닥쳐올 때면 노여
움을 삭일 줄도 안다. 그러나 그들은 무엇보다도 불의의 사회 현실에 대해 저항할
줄 아는 '더운 가슴'이 용솟음치는 민중들임을 강조하고 있다. 4연에는 고난과 시
련에도 불구하고 역사의 주체로 일어서는 강한 민중의 생명력이 함축되어 있다.
비록 벼는 피흘리며 베어지지만, 자기 희생을 통해 이룩한 '넓디넓은 사랑'에 만
족하며 조용히 쓰러진다. 쓰러짐이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임을 아는 벼의 고귀
한 희생을 거쳐 새로운 벼가 탄생되듯, 이러한 연속성 속에서 인간의 삶이 유지되
는 것을 민중들은 안다. 그러므로 그들은 서로의 처지를 이해하고, 서로의 아픔을
위로하는 삶의 동반자로서의 공동체 의식을 강화함으로써 역사의 주체로 일어설
수 있는 강한 힘을 얻게 되는 것이다.

 ▷ 작가의 말

학창시절 내가 만났던 좋은 시들은 내 정신의 키를 자꾸만 높여 주었습니다. 나는
내 또래 다른 아이들이 볼 수 없는 먼 곳을 보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나도 그렇
게 다른 사람의 마음을 송두리째 사로잡는, 그래서 잠못들게 만드는 그런 시를 쓰
고 싶었습니다. 학교 수업과 학과 공부는 엉망이 되어 갔습니다.

소위 명문대학 입시공부에 전념해야 할 시기에, 밤새워 글을 쓰거나 문학서를 읽고,
수업시간에는 꾸벅꾸벅 졸기만 했으니, 이게 어디 요즘 같으면 말이나 되겠습니까.
그래도 나는 그렇게 나아가는 삶이 나의 길이요, 그 길에서 추호도 비켜나서는 안된
다고 다짐하곤 하였습니다.

시를 읽고 좋아하고 쓰게 된 것은 중학 시절부터였습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축구
선수가 된 나는, 중학 2학년이 되자 미련없이 축구부를 떠나 문예부로 들어갔습니
다. 무엇보다도 문학은 운동을 하는 ‘재미’보다 사람의 마음을 뭉클하게 만드는 신
비로운 ‘힘’이 있다고 생각되었습니다. 내 영혼의 사춘기가 시에 눈을 떴다거나 할
까요?

고교 시절에 만난 좋은 시 가운데 폴 엘뤼아르의 ‘자유’라는 시가 있습니다. 광주에
서 문학강연회가 크게 열렸을 때, 다형 김현승 선생께서 낭독하신 작품입니다. 서울
에서 온 내로라하는 문인들의 강연에 하품만 하고 있다가, 쇳소리 같은 목소리와 박
력 넘치는 시의 가락에, 나는 눈을 번쩍 뜨고 연단을 응시하였습니다.

그것은 나로서는 하나의 감격이었습니다. 그로부터 얼마 후 다형 선생을 처음 뵈었
을 때, 나는 그 ‘자유’의 번역시를 빌려와 읽었으며, 그 시가 씌어진 배경과 그 시인에
대해서도 조금쯤은 알게 되었습니다. 좋은 시는 결코 다른 사람의 삶을 지나쳐 버리
지 않는다, 좋은 시란 개인적인 감정 토로에 그치지는 것이 아니다, 좋은 시는 이민
족과 총칼이 억압하는 상황에서도 저항의 무기가 될 수 있다, 좋은 시인은 그런 기개
를 잃지 않는 대쪽 같은 사람이다…. ‘자유’를 여러 차례 읽으면서 나는 이런 결론에
도달할 수 있었습니다.

군 복무를 마치고 나와 광주 집에서 무위도식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이미 나는 입
대 전 대학 재학 중에 4.19와 5.16을 체험했으며, 이 와중에서 ‘현대문학’ 3회 추천으
로 등단이라는 절차도 거친 뒤였습니다.

그러나 어떤 문학지에서도 원고청탁서 같은 것은 날아오지 않았습니다. 취직도 하지
못했습니다. 저녁 무렵이 되면 친구 화실에 나가 그림 그리는 것을 구경하다가, 그 친
구가 사주는 막걸리에 취해 돌아오곤 하였습니다. 그때 우리들이 드나들었던 ‘오센집’
이라는 막걸리집은, 광주의 문인들과 화가들이 저녁마다 모여 담론을 펼치는 장소이
기도 했습니다. 그 주막에는 마침 그 무렵 신축 중이던 큰 빌딩의 토목공, 철근공 등
노동자들도 적지않게 모여 하루의 피로를 씻어가는 듯했습니다.

나는 그 노동자들과도 친숙해져 말문이 트였지요. 허름한 옷차림의 노동자들 속에는,
내가 모르는 것을 ‘잘 아는’ 지식층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나는 그 친구들의 노동현
을 구경하는 때가 많았으며, 그 노동자 친구를 ‘나’로 변용시켜 ‘우리들의 양식’을 썼
습니다. 등단 무렵(1961~62년)의 어렵고 관념적인 언어를 벗어나, 노동자의 눈으로
보는 세계와 삶과 시대를 함축하고자 했습니다. 이 시를 가명으로 중앙지 신춘문예에
투고해 당선(1967년)하고, 그 상금으로 서울 변두리 모래내에 사글셋방을 얻어 살림
을 시작했습니다. 출판사에 취직도 되었습니다.

지금은 많이 달라졌습니다만, 모래내 일대는 당시 거의 모두 고향을 떠나온 사람들이
구차하게 살아가거나, 원주민들이 사는 시골과 같았습니다. 이농을 하고 올라와 도시
노동자, 상인이 된 사람들의 거처입니다. 나는 아침 저녁으로 버스 종점까지 10리 길
을 걸어 출퇴근을 했고, 일요일이면 조기축구회에 나가 운동을 했습니다. 이때부터
동네 친구가 많이 생겼습니다. 넝마주이를 하는 친구를 따라 난지도라는 곳을 처음 가
보았으며, 철공, 미장, 택시기사, 청소부들과 어울려 능곡, 파주 등지로 천렵을 나가는
때가 많았습니다. 나는 그들보다 ‘먹물’이 좀 들었다고는 하지만, 그들의 ‘눈’으로 ‘생
각’으로 삶을 바라보는 데 익숙해졌습니다. 나는 어느 사이 그들과 동화되어 있는 나
를 보았습니다. 그들은 저마다 다른 삶을 한 시대에 살아가는 개성적인 사람들이었으
며, 모두들 가난, 외로움, 상처를 지니며 살아간다는 공통점을 나는 발견할 수 있었습
니다. 나의 삶도 그들과 다를 바 없었습니다. 가난, 외로움, 상처야말로 나의 시가 보
듬고 가야 할 주제라고 믿게끔 되었습니다.

1960년대 후반에서 70년대 말까지 씌어진 나의 시들은, 모두 이처럼 소외되고 어렵게
삶을 이끌어가는 변두리 서민들의 정서와 관련이 있습니다. 서민적 기질과 체질의 나
의 시가 자리잡힌 것도 이 무렵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집에서 30여 분 걸어가면 난
지도 쓰레기산이 나타납니다. 그 아래에 쓰레기 더미를 정리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천막촌 같은 마을이 있었습니다. 그 마을은 온통 하늘을 가리는 먼지와 쓰레기 썩는
냄새로 가득했습니다. 그 속에서 이리저리 손으로 파리떼를 쫓으며 점심을 먹는 남녀
인부들을 보았습니다. 어떤 이는 아예 파리 몇 마리 도시락 밥 위에 앉거나 말거나 개
의치 않고 밥을 먹었습니다. 소줏잔에 파리가 앉아도 그대로 들이켰습니다. 마치 파리
들에게도 한 잔 마셔라 하고 권하는 것 같았습니다. 나에게는 그러한 모습이 짠하거나
슬펐던 것이 아니라 커다란 노여움으로 왔습니다.

이러한 풍경을 아무튼 배운 사람들은 모르고, 또 보려고 하지 않는다는 데서 나는 자꾸
화가 치밀었습니다. 노여움을 가득 가슴에 담고 나는 집으로 터덜터덜 돌아오곤 하였
습니다. 그 노여움은 내 안에서 익어 하나씩 시가 되었습니다.

1980년 5월 이후에 나는 언어와 시에 절망하였습니다. 그때 나는 신문 기자였습니다.
기자가 된 것을 후회하였고, 시인이 된 것에 부끄러움을 느꼈습니다. 사실과 진실은
삭제되거나 은폐되었습니다.

불의와 허위가 교묘하게 미화되어 여론을 형성해 나갔습니다. 그 갑갑한 시절에 시라
는 것들은 진실의 편에 서서 목소리를 내지 못했습니다. 나는 그 무렵 시와 언어를 경
멸하는 시 몇 편을 썼습니다. 욕설과 자기 학대, 절망으로 가득한 그 시편들은 더욱더
나를 비참하게 만들었을 뿐입니다.

그로부터 6, 7년 여 동안 나는 시를 쓰지 않았습니다. 시의 벙어리가 된 셈이지요. 김
삿갓은 스스로를 죄인이라고 생각하여 삿갓으로 하늘을 가리고 방랑했다고 합니다.
그 5월에 싸우지도, 기개를 펴지도, 죽지도 못했던 비겁한 나를 나는 죄인이라고 여겼
습니다. 산으로만 더 깊이 빠져갔습니다. 산에서도 사람들로 붐비는 곳을 피해 되도록
이면 인적이 드문 길로, 위험한 바윗길로만 다녔습니다.

동방삭이 말단 벼슬아치를 하면서 “…나는 속세에 숨어서 세상을 피하는 사람이다.
궁궐 속에서도 세상을 피하고 몸을 보존할 수 있는데, 어찌 꼭 깊은 산 속 쑥대집 밑
이어야 하리”라고 쓴 글을 위안으로 삼으면서, 나는 서울에 살면서도, 기자를 하면서
도, 세상을 등지고 산다고 생각했습니다.

산에 다닌지 10년 가까이 되었을 때, 나는 다시 시를 만지기 시작했습니다. 삼각산과
설악산에서의 암벽 등반 체험들을 나는 그냥 머릿속 기억으로만 남겨둘 수는 없었습
니다. 아름답고 가슴 벅찬 감동의 순간들을 기록해 두어야겠다는 생각에서 나는 다시
시를 썼고, 이것들을 드문드문 발표하였습니다. 산은 그러므로 문학에서 떠난 나를
문학으로 복귀시킨 계기가 된 셈이지요. 산길은 함께 가는 친구들이 있어도 ‘혼자’ 가
는 길입니다. 혼자서 내가 나를 책임져야 합니다. 아무도 내 발걸음을 대신 걸어주지
못합니다. 일행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가면서도, 나의 생각은 혼자 엉뚱한 곳
으로 가 꿈의 실체에 접근합니다. 혼자 가는 날에는 나의 영혼과 내가 이야기를 나누
며 갑니다.

혼자 가는 나를 지켜보는 것들도 많습니다. 손짓하는 풀꽃들, 나무들, 바위들, 바람과
햇볕이 있어, 나는 끝내 혼자가 아니라는 깨달음을 얻습니다. 하늘을 찌를 듯 뼈다귀
를 드러내고 서 있는 지리산의 고사목들은, 이 산에서 죽어 몸을 묻고 흙이 된 수많은
젊은이들의 안타까운 영혼들로 다가섭니다. 우리나라의 모든 산에는 이렇게 역사의
숨결과 내음이 곳곳에 배어 있습니다. 나는 그 숨결과 내음을 나의 빈약한 언어로 기
록해가고 있습니다. 이 기록은 지극히 개인적인 정서로 씌어지는 것이지만, 언어가
갖는 힘과 희망의 덕목을 저버리지 않도록 노력하고 있습니다.

나와는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게 한다는 것이, 그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가는
길에 있다는 것을 새롭게 확인합니다. 지금의 나에게 있어 문학, 삶, 산은 동의어가
되었습니다. 문학을 왜 하는가. 문학이야말로 내가 기꺼이 선택한 삶의 길이기 때문
입니다.            - 한국일보/2002/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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