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ntitled

처음으로

  나의문학기행   서예감상   Site Map   제작자   E-Mail

Untitled

  ■ 고대의 남도문학

  ■ 고려의 남도문학

  ■ 조선의 남도문학[1]

  ■ 조선의 남도문학[2]

  ■ 조선의 남도문학[3]

  ■ 조선의 남도문학[4]

  ■ 조선의 남도문학[5]

  ■ 현대의 남도문학[1]

  ■ 현대의 남도문학[2]

  ■ 현대의 남도문학[3]

  ■ 현대의 남도문학[4]

  ■ 현대의 남도문학[5]

  ■ 남도 민속기행

  ■ 남도 역사기행

  ■ 남도 정자기행

  ■ 남도 사찰기행

  ■ 남도 맛기행

  ■ 남도 섬기행

  ■ 남도 산기행

  ■ 남도 강기행

  ■ 남도 공원기행

  ■ 5·18과 문학

  ■ 학습자료실

  ■ 아름다운 한글

  ■ 이달의 세시풍속

  ■ 봉사활동

  유머게시판

  자유게시판

  ■ 글 남기기

 2001/8/12부터
 오늘: 18 전체: 1592503

 

인암리의 당산제

                                                   임   형

차   례

1. 머리말
2. 인암리 마을 개관
 1) 마을의 역사
 2) 마을 개관
3. 인암리의 당산제
 1) 당산신
 2) 제사의 종류
 3) 제관의 선정
 4) 제수 준비
 5) 제사 준비
 6) 제사의 진행
 7) 영험
4. 맺음말

1. 머리말

 2001년 음력 정월 대보름 전날에 당산제를 조사하기 위하여 전남 담양군 남면 인암리(全南 潭陽郡 南面 仁巖里)를 찾았다. 눈은 내리지 않았지만 꽤 쌀쌀한 날씨는 옷깃을 여미게 하였다. 미리 마을 이장에게 전화 연락을 해 두어서 마을에 도착하자마자 마을 당산제를 참관할 수 있었다. 인암리는 무등산 동편에 자리하고 있는데 광주에서 남면 소재지를 거쳐 화순 북면과 이서면 쪽으로 향하는 887호선 도로변에 위치한 광주 인접 마을이다. 화순온천이 가까이 있어 차량의 통행도 비교적 잦은 편이다.

 담양에서는 이 곳 인암리 외에도 당산제를 지내는 마을이 몇 군데가 있다. 용면의 분통리(里長: 382-2920)와 월산면의 중방리(里長: 382-2929), 남면의 경상리(里長: 382-1208) 등이 그 곳이다.

·조사지역: 전남 담양군 남면 인암리
·조사일시: 2001년 2월 6일(음력 1월 14일)
               2002년 1월 13일
·조사방법: 당산제 실제조사, 면담조사
·조사자: 임 형(林 亨)
·제보자: 박병인(朴炳仁, 남, 74세, 노인회장)
         박상갑(朴相甲, 남, 48세, 청년회장)
         김순이(金順伊, 여, 52세, 부녀회장)
         남태윤(南泰潤, 남, 42세, 제관, )
         김명우(金明雨, 남, 33세, 이장, ☏382-1096) 

2. 인암리 마을 개관

 1) 마을의 역사

 이 마을은 조선 숙종 때인 1680년경에 제주인(濟州人) 양석규에 의해 조성되었고 그후 장흥인(長興人) 고제진이 입주하였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조선조 말까지는 전라도 창평군 외남면 지역이었다가 1914년 담양군과 창평군의 통폐합에 따라 인암리라 하여 담양군 남면에 편입되었다. 마을 오른쪽에 있는 기린 모양의 바위를 기린바위라 부르면서 일제강점기까지는 인암(麟巖)이라 하다가 뒤에 인암(仁巖)으로 바뀌었다.

 이 마을에서는 해마다 음력정월 보름에 천룡제와 당산제를 지내왔다. 당산제의 당산나무는 당초 수령 500년의 노거수였으나 6.25사변 때 불에 타버리고 말았다. 1953년 다시 은행나무를 심어 이 나무를 당산신으로 삼고 제사를 지내왔으며 50여호에 이르는 집들이 전시에 전소하는 참화를 당하였으나 근검한 마을주민들이 재건하여 여러 씨족들이 함께 어울려 사는 평화로운 마을이다.
 이러한 마을의 역사를 담은 마을유래비가 인암마을 입구에 있는 마을회관 앞에 세워져 있다.

 2) 마을 개관

  인암마을은 세 곳으로 나누어 마을의 왼편을 잿가테, 중앙을 연화골, 오른편을 뒷등이라고 한다. 현재 57호의 가구 수에 인구는 약 150명 정도로 고씨(高氏), 김씨(金氏), 박씨(朴氏) 등 여러 성씨가 함께 살고 있다. 또한 장수촌으로 65세 이상의 노인만도 36명(남:11명, 여:25명)이나 되며 1902년 태생인 월전댁과 1908년생인 고광원옹이 그 중에 고령이다.

 마을에는 여러 동조직이 있는데 그 중에는 인암노인회(회장: 朴炳仁 74세), 유친계, 인암청년회(회원: 14명, 회장: 朴相甲 48세), 인암부녀회(회원: 26명, 회장: 金順伊 52세) 등이 있다. 마을의 이장은 젊은 나이의 김명우(金明雨, 33세)씨가 맡아 마을을 위해 심부름을 하고 있다.

 중복 때는 돼지나 염소를 잡아 약 100만원 정도의 예산으로 마을 잔치를 벌이기도 한다. 이때 드는 경비는 정월 초나흘부터 시작하여 약 닷새동안 벌어지는 지신밟기를 통해서  마련한다. 여기서 마련한 경비는 부녀회비에 포함시켜 봄철 야유회와 복날 위안잔치 비용으로 쓴다. 또한 매일 점심때는 마을회관에서 부녀회원들이 당번제로 돌아가며 노인들에게 무료로 식사를 제공하기도 하는데 이는 향우회(鄕友會)와 출향 인사(出鄕人士)들이 찬조한 돈으로 한다.

 설날에는 마을회관에서 공동세배를 하는 풍습이 있다. 올해는 노인이 20여명에 청장년 50여명이 참가하기도 했다. 마을회비를 항상 비축하여 이러한 때 경비충당을 하는데 초상이 나서 상여가 나갈 때에 노잣돈으로 들어온 금액 중 절반 정도를 마을회비로 넣기도 한다. 이는 모두 이장이 관리를 한다.

 매월 마을회관에서 마을회의를 열며 동계(洞契)는 그 해 마지막 날인 양력 12월 31일에 개최한다. 여기서는 마을의 당산제나 공동관심사 또는 이장의 판공비 등을 정하기도 하는데 참고로 작년 동계에서는 이장의 판공비를 97만원으로 책정하기도 했다.

 마을에서는 주업으로 벼농사를 짓는 농가가 많다. 인근의 창평면(昌平面)과 대덕면(大德面) 쪽에서 흘러내리는 하천('앞냇가랑'이라 부름)이 있어 가뭄을 타지 않고 논농사를 짓는 편이다. 근교농업으로 딸기와 채소, 매실, 수박, 포도, 고추 등을 재배해서 농가수입을 올리는 농가도 많다. 또한 요업(窯業)에 종사하는 가구도 있다.

 이곳에서는 보건진료소가 설치 운영되고 있어 주민들의 보건관리에 큰 도움을 주고 있으며, 광주에 인접해 있기 때문인지 비교적 젊은 세대들이 많은 편이어서 농촌 마을임에도 불구하고 마을 북편에 있는 담양남면초등학교   인암분교에는 초등학생 55명이 재학하고 있다.

  3. 인암리의 당산제 

 1) 당산신(堂山神)

마을 앞에 약 550년 된 느티나무가 있었다. 이 나무가 당산나무였으나 6.25 때 불타고 그 후로 다시 심은 수령 50년생 은행나무를 당산신으로 모시고 있다. 당산 주변은 돌무더기를 쌓아 둘렀으며 나무 앞에는 시멘트로 제단을 만들었다. 마을회관 옆에 서 있는 이 은행나무를 할아버지당산 또는 당산이라고 하고 마을 뒷등 능선 끝(인암리 산 14번지)에 있는 수령 300년 된 느티나무를 할머니당산 또는 천룡신이라 부른다. 그리고 마을 왼편 앞에 있는 약 200년생 느티나무를 아랫당산 또는 내당산이라고 부른다.

 2) 제사의 종류

 제사는 천룡제(天龍祭)와 당산제(堂山祭)로 나누어 지낸다. 천룡제는 음력 정월 14일 저녁 7시경에 할머니당산에서 드리며 제물은 비린 것을 쓰지 않는다. 당산제는 천룡제를 끝내고 나서 음식을 장만하기 시작해 자정이 넘으면 할아버지당산에서 모신다.

 3) 제관 선정

  매년 양력 12월 31일에 마을에서는 동계를 열어서 당산제의 제관과 화주를 선정한다. 이들은 모두 생기복덕(生氣福德)에 맞고 집안에 부정한 일이 없어야 한다. 정초에 제사나 초상, 산고 등이 없고 여자의 달거리까지도 없는 깨끗한 사람만이 자격이 주어진다. 전에는 이 마을의 김재원씨(金在元, 66세)가 주로 제관을 했으나 최근에는 마을사람들이 까다로운 제관을 기피하는 경향이 있어서 주로 이장이 맡아 하고 있다. 일단 제관이나 화주로 선정이 되면 근신을 하고 상가에 조문도 못 가며 대소변을 보고서는 반드시 목욕재계를 해야 할 정도로 몸을 삼간다.

 올해 제관은 이장이 개인 사정이 있어 맡지 못하자 남태윤씨가 담당했으며 화주는 최말순, 김재원, 박주일씨 등이 맡았다. 화주는 윗마을에서 2명, 아랫마을에서 2명이 돌아가며 맡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

 제관이나 화주의 복장은 따로 정해진 것이 없으나 다만 단정한 옷차림을 하며 화주는 머리에 수건을 써서 몸을 정결하게 한다.

 4) 제수 준비

  화주는 가까운 광주로 장을 보러가 제물을 준비한다. 이 때는 물건값을 깎지 않고 상인이 부르는 대로 값을 치른다. 천룡제와 당산제의 제물을 구별해서 준비하는데 천룡제물은 나물류와 탕류 등을 준비하고 당산제의 제수는 나물 다섯가지이상에 육류로는 돼지고기나 닭고기, 또한 생선에 떡, 과일, 포와 고막 등의 패류를 준비한다. 올해는 제물준비에 약 246,000원 정도가 들었다.  
 장을 봐 온 제물은 마을회관에 보관한다. 주변을 정결히 하기 위해 제물이 들어오는 순간부터 회관 둘레에는 금줄을 둘러친다. 제사의 경비는 모두 마을의 공동재산에서 부담한다.

 5) 제사 준비

음력 정월 보름 전날이 되면 마을에서는 당산제 준비를 한다. 길이 30m 정도가 되게 왼새끼를 꼬는데 장형문(85세)옹과 박경철(81세)옹이 주로 이를 맡는다. 이 왼새끼를 당산나무로 가져가 나무둘레에 7번을 감아두고 가로  30cm, 세로 60cm의 백지 위에 '堂山神位' 또는 '天龍神位'라고 써서 정면 중앙에 붙인다. 왼새끼의 중간 중간에는 약 80cm 간격으로 백지를 끼워 두고 할아버지당산, 할머니당산, 내당산에 둘러친다.

그리고 남은 왼새끼로 당산나무 근처에 금줄을 쳐서 잡인의 범접을 금한다. 전기가 들어온 뒤부터는 당산 주변을 밝히기 위해 전선을 끌어 당겨 백열전구를 당산에 달아 주변을 훤하게 밝히고 있다. 역시 부정한 것의 출입을 막기 위해 당산 주변에는 황토를 뿌려둔다. 금줄은 낮 12시경에 치며 황토도 이때에 뿌리는데, 이 일을 맡은 사람은 발을 깨끗이 씻은 상태에서 당산나무 주변과 할아버지당산에서부터 할머니당산에 이르는 길까지 2, 3발자국 간격으로 길 좌우에 뿌려둬야 한다.

 또한 정초에는 풍물패를 구성하는데 올해는 꽹과리 1명, 징 1명, 장구 2명, 북 2명, 소고 5명 등 10여명으로 구성하였고 상쇠에는 남태윤씨, 장구에는 김영설씨, 그리고 최규락, 박용복씨 등이 함께 했다. 이 풍물패는 정초에는 마을을 돌며 매구치기를 하고 보름에는 당산제에 참가하기도 한다.

 그리고 마을 사람들은 각 가정에서 찰밥이나 나물로 보름상을 준비하기도 하는데 천룡제가 끝나기 전에는 어류나 육류를 먹지 않는다.

 6) 제사의 진행

 저녁 7시경이 되면 금줄을 둘러친 회관에서 준비한 천룡제물을 가지고 매구를 치면서 할머니당산으로 가서 천룡신에게 제사를 올린다. 천룡신은 비린 것을 좋아하지 않으므로 비린내 나는 제물은 쓰지 않는다. 양쪽에 촛불을 켜고 앞줄에는 고사리나물, 무나물, 시금치나물, 콩나물, 도라지나물 등 나물류를 놓고 가운데 줄엔 삼탕을 뒷줄엔 떡과 밥과 미역국을 놓는다. 맨 앞에는 향을 피우고 술잔을 놓는다. 제주는 막걸리나 소주를 주로 사용한다.
                                                       <천룡제 진설도>
        

 제사 순서는 '강신-초헌-독축-아헌-종헌-헌식-소지-음복의 순서'이다. 천룡제의 축문은 다음과 같다. 

            <天龍祝文>

維歲次 辛巳正月庚寅朔十四日庚子
南泰潤 敢昭告于
天作主山 皆爲民居 一村禍福 神其主張
三百餘年 寔賴靈休 歲歲精福 以禱以賓
保我耆艾 恤我隣此 呵금弗祥 驅除여疫
士得魁榜 民安其業 商得萬錢 人有百福
家家小兒 善經痘疫 百穀大登 六畜亦蕃
一洞安靜 萬事亨通 群盜猛獸 병皆遠迹
非神何依 非民何奉 誠溢자粱 神尙來格

 음복은 간단하게 하며 제사가 끝나면 1시간 간격으로 풍물패가 매구를 치며 할아버지 당산과 할머니당산 사이를 왔다 갔다 한다.
  
 천룡제를 끝내고 당산제를 모시기까지의 사이가 약 3시간 정도 된다. 이 사이에 마을 사람들은 회관 앞에 모여 화톳불을 피워놓고 기다리는데 이 때 마을에 있는 방앗간에서는 보름상을 먼저 물려 마을사람들에게 내놓아 음복을 하게 함으로써 무료함을 달래게 한다.

 천룡제가 끝난 후 자정이 넘으면 그때에야 할아버지당산에 제사를 올린다.
화주는 머리에 수건을 쓰고 천룡제 후 마을회관에서 정결하게 마련한 제수를 당산으로 가지고 가서 밤 12시 20분경부터 할아버지당산 앞에 진설을 한다. 앞줄엔 대추, 곶감, 밤, 사과, 배, 고막, 명태포, 문어포 둘째줄엔 콩나물, 도라지나물, 시금치나물, 고사리나물, 무나물의 오채를, 셋째줄엔 생선, 연포, 김, 미역튀김, 넷째줄엔 두부탕, 생합탕, 새우탕과 닭고기 돼지고기를 놓고 마지막줄엔 떡과 미역국, 밥을 진설하며 상의 양쪽 가에 초를 세우며 상 앞쪽엔 향을 피우고 술잔을 놓는다.

                                       <당산제 진설도>   
제사는 '강신-초헌-독축-아헌-종헌-헌식-소지-음복'의 순서로 진행한다.
축문의 원본은 이장이 따로 보관하고 있다가 해마다 제사 때가 되면 새로 작성을 한다. 축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堂山祝文>

維歲次 辛巳正月庚寅朔十五日辛丑
南泰潤 敢昭告于
自古有民 必有社樹 何村無社 何社無神
至於吾村 社神最靈 經 保佑 三百餘載
肆以疫禱 極其誠敬 保我耆艾 恤我隣此
士得魁榜 民安其業 商得萬錢 人有百福
大小兒輩 善經痘疫 百穀大登 六畜亦蕃
一洞安靜 萬事亨通 呵금不祥 驅除여疫
群盜猛獸 병皆遠迹 非神何依 非民何奉
日吉자粱 神基鑑格

 당산제가 끝나면 마을 사람들은 모두 회관앞 마당에 모여 긴 백지로 소지(燒紙)를 하며 소원을 빈다.
제사를 지내고 난 음식은 조금씩만 나눠 당산나무의 왼쪽 밑에 묻고 황토를 덮는다. 또한 소지가 끝나면 일부 제물을 쌓아들고 매구를 치며 마을 앞 논 가운데에 있는 내당산으로 이동하여 따로 제사 의식은 없이 제물만 내당산 근처에 있는 소나무 오른 쪽 밑에 묻는다. 약 한시간에 걸친 제의가 모두 끝나면 마을 사람들은 모두 회관 앞에 모여 화톳불을 피우고 매구를 치며 제사 음식으로 음복을 하며 덕담들을 나눈다.

 7) 영험

 12,3년 전에 마을에서는 여러 가지 사정이 있어 2년간 당산제를 중단한 적이 있다. 그런데 계속해서 마을주민 7,8명이 사망하는 등 마을에 궂은 일이 자주 발생해서 다시 당산제를 지내게 되었다고 한다.

 또한 매년 당산제 제관을 맡고 당산제를 주관하다시피 한 김재원씨는 당산신의 덕인지는 모르지만 가난했던 살림이 펴지고, 3남 2녀의 자손을 두었는데 자식들이 모두 성공했다고 한다.

4. 맺음말

 이상에서 살펴본 인암리의 당산제는 몇가지 특징이 있다.

 먼저 당산제와 천룡제의 이중구조로 되어 있는 점이다. 당산신(堂山神)은 할아버지당산, 할머니당산, 윗당산, 아랫당산 등 모두 넷이다. 이 중에서 제사를 드리는 곳은 할아버지당산(당산신)과 할머니당산(천룡신) 두 곳이다.  유교식으로 하고 있는 제의 절차는 토속신앙(土俗信仰)과 유교(儒敎)의 결합을 보여주고 있다.

 다음으로 여기서는 아예 마을이장이 의무적으로 제관과 화주를 맡게 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는 매우 까다로운 제관의 역할을 요즘에 와서는 사람들이 꺼려하기 때문에 만든 제도인 듯한데, 아무튼 당산제를 매년 지속적으로 시행하려는 고육책(苦肉策)으로 보인다.

 인암리는 광주의 인근에 있는 마을이어서 이주민(移住民)들이 꽤 있는 편인데, 이들이 원주민(原住民)들과 융화를 하며 보다 적극적으로 제사에 참례를 하고 있어 자극제가 되고 있기도 하다. 마을 주민들이 능동적으로 동참하여 제사 후에는 음식을 나누고 매구를 치며 한바탕 축제를 벌이고 있는 것이 이 마을 당산제의 특징이다. 이런 점이 바로 마을민의 횡적인 유대감을 돈독하게 해 주는 당산제의 가치가 아닌가 한다.

                                                                돌아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