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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1/8/12부터
 오늘: 43 전체: 1428725

 

임억령과 식영정

임억령(林億齡: 1496-1568)

조선 중기 문신. 자는 대수(大樹). 호는 석천(石川)·하의거사(荷衣居士). 본관은
선산(善山). 우형(遇亨)의 아들이며 박상(朴祥)의 문인이다. 1516년(중종 11) 진
사가 되었고, 1525년 문과에 급제하여 부교리·사헌부지평·홍문관교리 등을 지냈
다. 45년 을사사화 때 금산군수(錦山郡守)로 있었는데, 동생 백령(百齡)이 소윤
(小尹)에 가담하고, 대윤의 많은 선비들을 추방하자, 양심에 가책을 느끼고 벼슬
에서 물러났다. 그 뒤 백령이 보내온 원종공신(原從功臣)의 녹권을 불태우고 해
남에 은거하다가 다시 등용되어 1552년 동부승지·병조참지를 지내고, 이듬해 강
원도관찰사를 거쳐 1557년 담양부사가 되었다.

벼슬을 그만 둔 만년에는 창평 성산에 집을 짓고 살면서 정자를 시제로 하여 많은
시를 지었으며, 해남으로 돌아간 뒤에도 성산을 자주 왕래하다가 1568년 해남에
서 73세로 일생을 마쳤다. 그는 도량이 넓고 청렴결백하였으며 시문을 좋아하였
다. 전라남도 동복의 도원서원(道源書院), 해남의 석천사(石川祠)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석천집》이 있다. 석천 임억령의 문학 세계는 그가 남긴 3,000여 수의
한시에 담겨있다. 수량면에서도 압도적인 숫자이지만, 그가 남긴 한시 하나 하나가
절창이라고 할 수 있다.

                      <임억령의 필적>

▷ 임억령의 시

古寺門前又送春
殘花隨雨點衣頻
歸來滿袖淸香在
無數山蜂遠진人

오래된 절 앞에서 봄날을 보내는데
꽃잎은 비에 날려 무수히도 옷에 앉네
집에 와도 소매 가득 향기가 일어나니
수 많은 산벌들이 사람 좇아 날아드네

식영정(息影亭)

전남 담양군 남면 지곡리에 있는 정자. 식영정이란 '그림자가 쉬고 있는 정자'라는
뜻으로 장자에 나오는 말이다.

아름다운 경치와 좋은 주인을 찾아, 이곳에는 수많은 문인과 학자들이 드나들었다.
담양군 남면 지곡리 별뫼마을 창계천 건너편 충효리가 바라보이는 곳, 언덕 아래로
잔잔한 광주호가 마음을 비우게 하는 야트막한 산자락 위에 자리잡은 정자가 바로
식영정이다. 이 정자는 명종15년(1560)에 서하당 김성원이 장인인 석천 임억령을
위해 세운 정자이며, 서하당은 석천의 사위이면서 제자였다.

이 곳을 자주 드나들었던 임억령, 김성원, 정철, 고경명을 '식영정 4선(四仙)'으로
불렀다. 그래서 식영정을 사선정이라고도 했다. 이들은 성산의 경치 스무곳을 택하
여 각 20수씩 모두 80여 수의 식영정 이십영을 지었는데, 이것은 송강 정철의 성산
별곡의 밑바탕이 되기도 하였다.

석천은 이곳에서 옥봉 백광훈, 백호 임제, 송천 양응정, 고죽 최경창 등의 제자를 길
러내 성산동 계산풍류의 시종(詩宗)으로 추앙을 받았다.

                                          <식영정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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