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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1/8/12부터
 오늘: 8 전체: 1413737

 

해상왕 장보고

 ▷ 생애와 활동

장보고(張保皐 ?∼846)는 신라의 위대한 모
험가요, 청해진(淸海鎭)을 세계 무역의 전진 기
지로 만든 해상왕이다. 그는 "바다를 제패하는
사람이야말로 세계를 제패할 수 있다."는 신념
을 가진 정치가이며 무역상이자 항해가 일 뿐만
아니라 군사 전략가였다.

장보고에 대한 기록은 국내뿐만 아니라 중국 및
일본 사서와 외국인들의 연구에 의해 더 잘 보존
되고 있다.

장보고의 출생시기와 출생지는 분명하지 않으나
지금까지의 연구결과에 의하면 통일신라 말기인
서기 790년경 전라남도 완도에서 출생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삼국사기에 '해도인(海島人)'이라
고 기록된 점이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활쏘기와 창던지기에 뛰어난 능력을 보
여 '궁복(弓福)', '궁파(弓巴)'로 불리었다.

장보고는 헌덕왕 12년인 서기 810년경 친구 정년
(鄭年)과 함께 당나라로 건너가 지금의 중국 강소성 서주 지방의 절도사 휘
하의 주력부대인 무령군에 입대하여 이민족으로서는 예외적으로 30세 초반
의 나이에 군사 5천명을 거느릴 수 있는 '무령군중소장'직까지 올라 군인으
로서 출세를 하게 되었다.

이후 장보고는 당나라에 거주하던 신라인과 고구려·백제 유민들을 규합하여
무역에 종사하였으며 지금의 중국 산동성 영성시 석도진에 위치한 적산포에
'법화원'을 건립하여 유민들과 유학승들의 안식처를 제공하는 등 당나라에서
자치적인 집단을 이루고 있던 신라방, 신라촌의 총수로 성장하였다.

당나라에서 무령군중소장으로 재직시 신라인들이 당나라 해적선에 의해 납
치되어 노예로 인신매매 되는 상황을 목격하고 격분한 후 신라인을 구하고
해적을 소탕하기 위해 서기 828년  귀국하여 신라 제42대왕인 흥덕왕에게
서남해안의 실태를 보고한 후 완도 청해진에 진을 설치하여 해적으로 소탕할
것을 건의하자 국왕은 군사 1만명을 주고 장보고를 '청해진 대사'로 임명하였다.

이후 장보고는 청해진을 중심으로 해상활동을 펼쳐 해적, 노예상을 소탕하고
각지에 난립해 있던 군소 해상집단을 평정한 후 중국과 일본내의 신라인과 고
구려·백제 유민들을 규합하여 신라·당·일본의 삼각해상무역의 실시로 막대한
부를 축적하였으며 자위적인 군사력마저 보유하여 동북아시아의 해상교통권
과 무역권을 완전히 장악하게 되었으며 '견당 매물사' 또는 '회역사' 등의 명칭
으로 당과 일본에 교관선을 파견하거나 멀리 아라비아 상인들과의 무역에도
영향력을 행사하여 명실상부한 해상무역왕으로 군림하게 되었다.

한편 제42대 흥덕왕 사후 신라 조정은 치열한 왕위쟁탈전이 전개되었으며 막
강한 군사력과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던 장보고의 도움으로 제45대 신무왕에
등극한 김우징은 장보고에게 '감의군사'라는 벼슬를 하사하고 장보고의 딸과
신무왕의 아들 김경응간의 혼인을 약속하였다. 신무왕이 등극 4개월 만에 사
망하고 아들 김경응이 서기 839년 제46대 문성왕으로 등극하자 문성왕은 부
왕의 약속에 따라 장보고의 딸을 왕비(차비)로 간택하려 하였으나 장보고의
세력강화를 우려한 다른 귀족들이 장보고는 '해도인'이고 장보고의 딸은 천
민이라는 구실로 반대하여 실패하였다.

막강한 군사력과 부를 보유한 장보고의 세력 확대를 우려한 중앙 귀족들은
문성왕의 차비 간택문제를 계기로 장보고를 제거할 계획을 세우고 장보고의
부하였던 염장을 보내 문성왕 8년인 서기 846년 장보고를 암살하였다. 장보
고 사후 청해진은 염장에 의해 한동안 관장되다가 서기 851년에 완전 해체되
었으며 장보고의 부하들은 중국과 일본으로 도피하면서 찬란했던 해상왕국이
막을 내리게 되었다.

 ▷ 기록

우리나라의 경우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동국통감, 동사강목 등에 기록되어
있으나 대부분 장보고의 해상활동과 업적에 대한 내용은 없고 국내의 정치
사항만 언급되어 있어 부정적인 내용이 많다.

중국측 기록으로는 「신당서(新唐書)」 제 220권 '동이전'과 '신라전'에 관
련 기사가 실려 있는데 이는 당나라 시인 두목(杜牧)이 지은 「번천문집(樊
川文集)」 제 6권의 「장보고·정년(鄭年) 전」을 그대로 인용한 것이다. 중
국에서는 두목(杜牧)시인이 장보고의 전기를 지어 후세에 전할만큼 장보고
는 중국에서 크게 존경받던 위대한 인물이었다.

일본의 경우 대표적인 일본의 역사서인 일본후기, 속일본기, 속일본후기 등
에 장보고에 관한 기록이 많이 나타나 있으며 가장 권위 있고 자세히 언급된
역사서는 장보고의 도움으로 당나라에서 9년 6개월 동안 불교수업을 한 일
본의 대표적인 구법승 엔닌(円仁)이 저술한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
禮行記)> 이다. 훗날 일본에서는 재신(財神)을 의미하는 장보고(張寶高)로
높여 부르고 있다.  

 ▷ 장보고 유적

장보고는 그의 본원 사찰로 중국 석도의 적산, 완도의 상황봉, 제주 등지에
법화원을 창건했다. 일본 스님 엔닌 일행은 이 절의 손님으로 오래 머물며
갖가지 편의를 받았고 장 대사의 도움으로 마침내 귀국도 가능했다. 중국
에는 신라 사람들이 모여 살던 신라방과 그 자치 기관이 있었다.

 ▷ 청해진 유적지

1984년에 완도군 완도읍 장좌리 장도 일대가 사적 308호로 지정되었다.
완도군청 소재지에서 북서쪽에 위치한 장좌리 앞 바다에 전복을 엎어놓은
듯 둥글넓적한  장도(일명 장군섬)가 있다. 마을에서 장도까지의 거리는
180m쯤 되고 하루 두 차례씩 썰물 때는 바닥이 드러나 걸어서 들어갈 수
있다.

                                   <장도의 전경>

이곳에서는 당시 화려했던 모습을 엿볼 수 있는 기와, 토기 등 여러 유적과
유물이 장도를 중심으로 완도의 여러 곳에서 발견되고 있으며 물이 빠졌을
때는 장도 남쪽 갯벌에서, 원래 청해진을 방비하기 위해 굵은 통나무를 섬
둘레에 박아놓았던 목책의 흔적이 드러난다. 유적으로는 청해진성, 와당편
다수, 토기편, 사당, 법화사지터 등이 있다. 장도의 남쪽과 북서쪽 해안에는
약 1,000여개의 직경 40∼80cm의 목책이 남아있다.
섬 중앙에 직경 1m, 두께 30cm의 맷돌이 하나 남아 있으며 장좌리 뒤쪽의
상황봉 기슭에는 여러 채의 건물이 있었던 흔적이 있다.
             위는 완도군에 있는 드라마 <해신>의 촬영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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