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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1/8/12부터
 오늘: 6 전체: 1413735

 

성리학자 전우

전우(田愚: 1841-1922)

본관 담양(潭陽). 자는 자명(子明). 호는
구산(臼山)·추담(秋潭)·간재(艮齋). 성리학자.

어려서부터 학문이 뛰어나, 14세 때에는 아버
지를 따라 서울 정동·삼청동·순화동(順化洞)
등에서 살았는데, 이때부터 임헌회(任憲晦)의
사랑을 받기 시작하였으며, 21세 때에는 임헌
회를 직접 아산의 신양(新陽)으로 찾아가 사제
의 의를 맺었다.

1882년(고종 19) 선공감가감역(繕工監假監役)·
감역·전설사별제(典設司別提)·강원도도사, 18
4년 사헌부장령, 이듬해 순흥부사·중추원찬의
(中樞院贊議)를 제수받았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그의 명성이 널리 알려지자 1895년 을미년에
는 박영효(朴泳孝) 등이 수구(守舊)학자의 우
두머리로 지목하여 개화를 실현시키려면 전우
를 죽여야 한다고 여러 번 청하였으나 고종의
승낙을 얻지 못하였다.

68세 되던 해부터 나라가 어지러워지자 왕등도·
군산도(群山島) 등에 들어가 나라는 망하더라도 도학을 일으켜 국권을 회복하겠다고 결
심하고, 작은 섬을 옮아가면서 학문을 폈다.

72세 되던 해에 계화도(界火島)에 정착하고, 계화도(繼華島:중화를 잇는다는 뜻)라 부
르면서 82세에 죽을 때까지 수많은 제자를 길러내었으며 60여책의 저서를 남겼다.
지금의 계화도에 있는 집은 모두 당시의 제자들이 지은 것이라고 한다.

그의 성리학적 연구업적은 높이 평가되고 있으며, 전통적인 유학사상을 그대로 실현시
키려 한 점에서 조선조 최후의 정통유학자로서 추앙받고 있다. 그러나 그의 행적에 대하
여는 나라가 망하여도 의병을 일으키려 하지 않고, 도학군자만을 자부하고 있었다는 것
과 이른바 파리장서(巴里長書)에 참여하지 않았다고 하여 그를 지탄하기도 하였다.

                                              <전우의 글씨>

▷ 전우의 성리학

그는 의리를 숭상하여 조선조에 있어서 다섯 사람의 어진 이로서 조광조(趙光祖)·이황
(李滉)·이이(李珥)·김장생(金長生)·송시열(宋時烈)을 동방의 5현이라고 하여 이들의 문
집 가운데서 좋은 말을 뽑아 《오현수언》을 만들었는데, 이는 《근사록 近思錄》과 같
은 체재를 모방한 것으로서 그의 의리정신이 어떠하였는가를 엿보게 하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생각과 조금이라도 의견을 달리하는 점이 있으면 주저하지 않고 그 잘못을
지적하여 자기의 성리학설을 세웠다. 그러므로 그 자신이 김창협(金昌協)을 연원으로
하여 사상적인 영향을 받았지만, 《농암사칠의의(農巖四七疑義)》를 지어서 그 불합리
함을 지적하고, 기정진(奇正鎭)의 〈외필(猥筆)〉을 반박하는 〈외필변(猥筆辨)〉을 썼
으며, 이항로(李恒老)에게도 〈화서아언의의(華西雅言疑義)〉로, 이진상(李震相)에게
역시 〈이씨심설조변(李氏心說條辨)〉으로 반박하였다.

그는 오직 이이와 송시열의 사상을 계승하는 데 힘썼으며, 그 나름대로 성리학적 경지를
창안하여 심본성설(心本性說)을 주제로 성존심비(性尊心卑) 또는 성사심제(性師心弟)의
설을 부르짖었다.

그는 이러한 창안이 주자(朱子)의 학설을 올바로 이해한 것이라 하였다. 이는 주자가 인
간의 도덕적 의지와 작용을 설명하면서 성을 가장 근본적인 것으로 여겼다는 점에 착안
한 것이다. 주자가 모든 도덕적 의지는 성(性)에 근본하고 성은 천리(天理)라고 말하였기
때문에 천리인 성은 당연히 높고 마음은 낮은 것이라 하였다.

그는 “주자가 말하기를 성은 태극이라 하였고 심(心)은 음양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하
늘과 태극은 마땅히 높은 것이고 심과 음양은 마땅히 낮은 것이다.”라 하였고, 또 “이를
미루어보면 성은 스승이고 심은 제자라는 것은 주자의 설에 바탕을 두기는 하였으나 내
가 새로 창시한 것이니 의리가 지극히 정미한 것이며 절실한 공부이며 이것이 스스로 만
든 심제(心弟)두 글자이다.”라고 하였다.

또한 그는 심성론(心性論)에 있어서도 성은 천리이며 심은 기(氣)라고 주장함으로써 ‘심
즉리(心卽理)’ 설에 반대하였다.

이와같은 견해는 송시열의 학설을 이어받은 것으로 보인다. 이기(理氣)에 대하여는
〈이기유위무위변 理氣有爲無爲辨〉에서 태극은 이만 있고 동정(動靜)의 능력은 없으
며 음양이 동정한다고 하였다. 이를 무위(無爲), 기를 유위(有爲)한 것이라 하였고, 인
간에게 있어서도 성은 무위한 것이며 심은 유위한 것이라고 하였다.

심성(心性)에 대하여는 성은 천리로서 무형·무위이며 심은 유위의 기라고 하였다. 그러
므로 성은 순선(純善)이므로 대본(大本)이며 심은 작용이니 성명(性命)의 도덕성에 근
본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였다.

이와같은 그의 학문적 성격과는 달리 처신에 대하여는 여러 의견이 엇갈리고 있다.
“간재는 죽기가 무서워 의병을 일으키지 못하였고, 화가 미칠까 두려워 외세를 배척
하지 못하였다.”(金平默)고 하였다.

그러나 전우 자신은 정통 왕권(王權)의 계승만이 국권의 회복이라 하였고, 파리장서에
가담하지 않은 것도 이적(夷狄)을 끌어들이는 일이라고 하여 “이는 척화를 하기 위하여
또 다른 외세의 간섭을 자초하는 일이니 열강의 세력을 빌려 이들에게 호소하는 일은
하지 않겠다.”고 거절하였다.

그의 이와같은 견해를 따로 모은 책이 《추담별집 秋潭別集》이다. 이에 의하면 “국권
을 회복한다고 하면서 외세와 손잡게 되면 이는 나라를 회복하기 이전에 내몸이 먼저
이적이 되는 것이니 이는 절대로 할 수 없는 일이다.”, “500년 종사도 중요하지만 3, 000
년의 도통(道統)을 잇는 것이 더 소중하니 무가치하게 목숨을 버리지 말고, 학문을 일으
켜 도(道)로써 나라를 찾아야 한다.”, “을사년의 수치에도 통곡할 수밖에 없었고, 우리의
모든 선비는 마땅히 피를 토하고 눈물을 흘리며 이를 악물고 살 수밖에 없으나, 눈앞의
위태함만을 알고 나라의 참된 힘이 무엇인가를 깨닫지 못하면, 그것은 총칼 앞에 헛되
이 목숨을 버리는 일일 뿐이니, 차라리 몸과 마음을 올바로 가다듬어 신명을 얻어 학문
을 열심히 닦아 뜻을 편다면 1년, 2년, 10년, 20년 어느 때인가는 우리의 힘으로 이룰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제자로는 오진영(吳震泳)·최병심(崔秉心)·이병은(李炳殷)·송기면(宋基冕)·권순명(權純
命)·유영선(柳永善) 등 3, 000여명을 헤아리고 있다. 저서로는 《간재집》(60책)·《간재
사고(艮齋私稿)》(30책)·《추담별집》(2책) 등이 있다.

▷ 유적지

그의 묘소는 전라북도 익산에 있다. 1933년 그 제자들이 부안 계화도에 계양사(繼陽祠)
를 세워 제향하였다. 또한 고창읍에 용암사(龍岩祠), 고부에 태산사(台山祠), 충남 서산
에 안양사(安陽祠), 경남 의령(慶南 宜寧)에 의산사(宜山瀉)를 세워 제향하였다.
화도에 유적비가 세워져 있다.

                                     <계양사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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