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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1/8/12부터
 오늘: 41 전체: 1428723

 

최석의 팔마비

 ▷ 팔마비(八馬碑)의 유래

원래 비란 왕이 승하하면 신하들이 임금의 공덕을 찬양하기 위하여 세우
는 것이 원칙이었다. 이것을 민간인이 모방하여 관찰사나 군수 현감에 대
하여도 그들의 공덕이 있을 때는 비를 세워줬다.

중국의 「서경잡기」에 보면 후한 오장(吳章)이란 사람이 군의 태수로서
선정하였기 때문에 그가 죽은 후 묘 앞에 비를 세웠다고 하는데 이것을
선정비의 시초로 본다. 우리나라에서는 고려 25대 충렬왕 때 부사최석
(崔碩)이 선정을 베풀어 팔마비를 세웠다고 하는데 이것이 처음인 듯하다.

승평부에서는 태수가 바뀌어 돌아가면 태수에게는 말 8필을 주고 부사
에게는 7필을, 그리고 법조에게는 6필을 주되 마음대로 고르게 하였다.
부사 최석이 갈려감에 미쳐서도 읍민들이 말을 바치고 좋은 것 고르기
를 청하니 석이 웃으며 말하기를 "능히 서울에만 이르면 족할 것인데 말
을 골라서 무엇하겠는가."라고 하며 집에 돌아간 뒤 그 말들을 되돌려 보
내었는데 고을사람들이 받지 않으므로 석이 말하기를 "내가 그대들 고을
에 수령으로 가서 말이 망아지를 낳은 것을 데리고 온 것도 이는 나의 탐
욕이 된다. 그대들이 지금 받지 않는 것은 아마 내가 탐을 내서 겉으로만
사양하는 줄로 알고 그러는 것이 아니겠는가." 하고 그 망아지까지 모두
8필을 돌려주니 고을사람들이 그 덕을 칭송하여 비석을 세우고 팔마비라
하였다. -「고려사」「신증동국여지승람」

                                          <팔마비>

 ▷ 칭송시

來往昇平節序移
送迎多愧奪民時
莫言無德堪傳後
復起崔君八馬碑

승평에 왔다 가는 관리, 절기의 순서가 바뀌듯 하나니,
그를 보내고 맞이하느라 백성의 때를 빼앗음이 심히 부끄러워라.
덕을 베풀지 아니하고도 그 이름이 후세에 전하여진다고 말하지 말라.
최군의 팔마비같은 칭송이 다시 있으리라
- 부사 최원우

옛부터 산천이 몇 번이나 변하고 옮겨졌을까  
기반이 없어지고 매몰된 것이 이미 여러 번일세.
이름은 굳게 샛길 필요가 없네.
호사자들이 입에서 입으로 비를 세워주리니
- 지봉 이수광

 ▷ 유적지

현재의 팔마비는 이수광이 중건하여 전해오다가 일제 강점기 때(1930년)
시가지 정비계획에 따라 당시 승주군청 앞 도로변으로 옮겨진 것으로 지
방유형문화재 제 76호이다. 비석의 규모는 높이 160cm, 너비 77.5cm이
다. 대석은 가로 140cm, 세로 85cm, 높이 40cm 이다. 비석의 전면에는
팔마비라 양각되어 있으며 뒷면은 팔마비 중건기를 음각한 것인데 현재
마멸이 심하여 해독할 수 없는 상태이다.  

또한 순천시 죽도봉 공원에 재일교포 김계선씨가 1975년 3월 연자루를
이전 복원하면서 팔마탑을 세웠다. 또한 순천시에서는 매년 10월 15일
순천시민의 날에 팔마문화제를 개최하고 있다.

                                    <순천 죽도봉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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