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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1/8/12부터
 오늘: 8 전체: 1413737

 

 한하운의 보리피리

 ▷ 한하운(韓何雲: 1920.3.20-1975.2.28)

본명은 태영(泰永). 함경남도 함주 출신. 1932년 함흥제일공립보통학교,
1937년 이리농림학교를 졸업한 뒤 일본으로 건너가 1939년 동경 세이케
이고등학교(成蹊高等學校) 2년을 수료하였다. 그 해 중국 북경으로 건너가
1943년 북경대학 농학원을 졸업하였다.

1944년부터 함경남도 도청 축산과에 근무하였으나 1945년 한센씨병(나병)
의 악화로 관직을 사퇴하고 서점을 경영하기도 하였다. 1946년에는 함흥
학생데모사건 혐의를 받고 체포되었다가 석방된 바도 있다. 그 뒤 치료비
로 가산을 탕진하고 1948년 월남, 유랑의 생활을 하였다.

그 뒤 자신의 투병 생활과 함께 1950년 성혜원(成蹊園), 1952년 신명보육원
(新明保育院) 등을 설립, 운영하였고, 1953년 대한한센연맹위원회장으로 취
임하여 나환자 구제사업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그 뒤 1966년에는 한국사회
복귀협회장을 역임하는 한편, 무하문화사(無何文化社)라는 출판사도 경영
한 바 있다.

그의 창작 활동은 학창시절부터 시작되었으나 본격적인 문단 활동은, 1949
년 이병철(李秉哲)의 소개로 ≪신천지 新天地≫ 4월호에 〈전라도길〉 외에
12편의 시를 발표하면서부터 전개되었다. 같은 해에 첫 시집 ≪한하운시초≫
를, 1955년에는 제2시집 ≪보리피리≫를, 1956년에는 ≪한하운시전집≫을
펴냈다.

그러나 1960년대부터는 시를 거의 쓰지 않았다. 그의 작품은 나환자라는 독
특한 체험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감상으로 흐르지 않고 객관적 어조를 유지
하고 있다는 점에서 특징을 찾을 수 있다. 또한, 온전한 인간이 되기를 바라
는 간절한 염원을 서정적이고 민요적인 가락으로 노래하고 있다는 점도 그
의 시적 특징으로 지적할 수 있다.

유해는 경기도 김포군 장릉공원묘지에 안장되어 있다. 그가 남긴 저서에는,
자서전 ≪나의 슬픈 반생기≫(1957), 자작시해설집 ≪황톳길≫(1960),
≪정본(定本)한하운시집≫(1966) 등이 있다.  

 ▷ 작품세계

보리피리

보리피리 불며
봄 언덕
고향 그리워
피―ㄹ닐니리.

보리피리 불며
꽃 청산(靑山)
어린 때 그리워
피―ㄹ닐니리.

보리피리 불며
인환(人 )의 거리
인간사(人間事) 그리워
피―ㄹ닐리리.

보리피리 불며
방랑의 기산하(幾山河)
눈물의 언덕을 지나
피―ㄹ닐리리.

<일제강점기 일본인원장에 의한 강제노역 당시 원장의 지휘대로 쓰였던 큰
마당바위에 지금은 한하운 시인의 시 <보리피리>가 새겨져 있다>

이 시는 나병 환자로서의 비통과 울분과 괴로움을 시적 여과 장치를 통하여
극복함으로써 인간의 존엄성 회복을 지향하고 있다. 나병으로부터 오는 절
망과 세상 사람들과 유리된 채 유랑 생활을 해야 하는 고독 속에서 고향과
어린 시절 그리고 세상사가 그리워 보리피리를 부는 시인의 다음 글은 더욱
절절한 심정을 토로하고 있다.

  "청운의 뜻이 허허, 천형의 문둥이가 되고 보니 지금 내가 바라보는 세계란
오히려 아름답고 한이 많다. 아랑곳없이 다 잊은 듯 산천 초목과 인간의 애환
이 다시금 아름다워 스스로 나의 통곡이 흐느껴진다. 나를 사로잡는 것, 그것
은 울음 속에서 터지는 모든 운율이 나의 노래가 되고 피리가 되어 조국 땅 흙
속에 가라앉은 것이다."

파랑새

나는
나는
죽어서
파랑새 되어

푸른 하늘
푸른 들
날아다니며

푸른 노래
푸른 울음
울어 예으리.

나는
나는
죽어서
파랑새 되리.
             

1945년 봄이었다. 「결절이 콩알 같이 스물스물 몸의 양역에 울뚝불뚝 나타나
는 것이었다. 검은 눈썹은 자고 나면 자꾸만 없어진다. 코가 막혀서 숨을 제대
로 쉬지 못하고 말은 코먹은 소리다. 거울을 쳐다보니 얼굴은 사람의 얼굴이
아니라 바로 문둥이 그 화상이었다」

직장의 상사마저 그가 나환자라는 것을 알아채었다. 그는 다시 함흥 중앙동
고향집으로 돌아갔다. 그는 그때부터 두문불출, 꼭 나가야 할 일이 있을 때는
낯익은 이목을 피해 밤을 이용했다.

전신에 고름이 흐르고 방안에는 악취가 풍겼다. 그 무렵부터 48년 그가 월남
할 때까지 4년간이 가장 처절한 투병 기간이었다. 그는 죽음을 통해서 자유를
구가하려고 했다. 이름마저 본명을 버리고 하운(何雲)이라고 고쳤다.

 '파랑새'가 되고자 하는 것은 동경이요, 이상이었다. 현실은 지옥이었다.
살아가는 것은「한번밖에 없는 자살을 아끼기」위해서였다. 게다가 기뻐
해야 할 8.15 광복은 그에게 이중 삼중의 고통을 안겨 주었다. 공산주의자
들에게 가산을 몽땅 빼앗기고 나자 입에 풀칠을 하기 위해 아우의 뒷전을
따라다니며 노점 책장사를 했고, 돈이 조금 모이자「건국서사](建國書肆)
라는 책점을 차렸으나 그것도 잠시였다.

전라도 길

가도 가도 붉은 황토길
숨막히는 더위 뿐이더라.

낯선 친구 만나면
우리들 문둥이끼리 반갑다.

천안 삼거리를 지나도
쑤새미 같은 해는 서산에 남는데.

가도 가도 붉은 황토길
숨막히는 더위 속으로 쩔룸거리며
가는 길.....

신을 벗으면
버드나무 밑에서 지까다비를 벗으면
발꼬락이 또 한 개 없다.

앞으로 남은 두 개의 발꼬락이 잘릴 때까지
가도 가도 천리 먼 전라도 길.  
                                

<소록도로 가는 길에>란 부제가 붙은 이 시는 커다란 반응을 일으켜「정
음사」에서는 무조건 시집을 내겠다고 나서 그는 명동 성당의 방공호에
서 원고를 정리했다. 그리하여 그의 첫시집인 <한하운시초>(26편 수록)
가 빛을 보게 된 것이다.

 ▷ 소록도 유적

전라남도 고흥군 소록도는 일제강점기부터 조성한 한센병환자 요양시설이
있다.
소록도공원에는 한하운시비가 있다.

                                <소록도 거주지와 구라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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