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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1/8/12부터
 오늘: 38 전체: 1413552

 

 현기영의 순이삼촌

 ▷ 현기영(玄基榮: 1941.1.16-)    

제주도 제주시 출생. 1960년 제주 오현고등
학교를 졸업하고, 1967년 서울대학교 사범
대학 영어학과를 졸업했다. 대학졸업 후 서
울 광신중학교, 서울사대부중 등에서 교직
생활을 하다가 1975년 《동아일보》 신춘문
예에 단편소설 <아버지>가 당선되어 등단했
다. 같은 해에 <꽃샘바람> <초혼굿> <실어증>
등을 발표했으며, 이어 1976년 단편 <동냥꾼>
과 <소드방놀이>를 발표하여 부조리한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도시인의 좌절감을 일반화
한 모더니즘적 경향을 보여주고 있다.

1978년 제주도 4·3사건을 작품화한 중편소설
<순이삼촌>을 발표함으로써, 제주도의 민중
사를 본격적으로 다루는 문제작가로서 문단
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이 작품으로 필화사
건을 겪는 등 개인적 고통이 따랐으나 1970
년대 최고의 문제작으로 평가받음으로써 향후 작품세계를 결정짓는 계기가
되었다. 이어 4·3사건을 문학적 화두로 삼아 <도령마루의 까마귀>(1979) <해
룡 이야기>(1979) <길>(1981) <어떤 생애>(1983) <아스팔트>(1984) 등의 작
품을 잇달아 발표하면서 역사적 수난기에 처한 제주민중의 삶을 치밀하게 탐
색해 '4·3 작가'로 불리게 된다. 이러한 문학적 활동과 함께 제주 4·3연구소 소
장과 제주사회문제협의회 회장 등을 역임하며 꾸준히 4·3 관련 활동을 펼치고
있다.

1980년대에 들어서도 제주도의 역사적 삶에 대한 관심은 계속되어 제주도에
서 발생한 방성칠의 난(1898)과 이재수의 난(1901)을 다룬 장편소설 <변방에
우짖는 새>를 신문에 연재했다. 1990년대에 들어서는 단편 <위기의 사내2>
<거룩한 생애> <쇠와 살> <야만의 시간> <고향> 등의 작품을 통해 다큐멘터
리기법을 도입하는 등 소설형식의 다양한 실험을 시도함으로써 동일소재의
단조로움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을 보여주었다. 이어 자연과 하나가 되려는 한
인간의 꿈이 역사의 힘 앞에서 무참히 좌절되는 단편 <마지막 테우리>(1994)
와 자전적 성장소설 <지상에 숟가락 하나>를 발표해 1990년대 한국문학사에
뚜렷한 발자취를 남겼다.

등단 이후 줄곧 제주도의 민중사를 작품화함으로써 민족문학작가로 평가받는
현기영은 2001년 3월부터  민족문학작가회의 이사장을 역임하고 있으며 현재
한국문화예술진흥원 원장도 맡고 있다.

작품집 《순이삼촌》(1979) 《아스팔트》(1986) 《마지막 테우리》(1994) 등
이 있고, 장편소설 《변방에 우짖는 새》(1983) 《바람타는 섬》(1989) 《지상
에 숟가락 하나》(1999) 등이 있다. 이 밖에 수필집 《젊은 대지를 위하여》
(1989)가 있다. 주요문학상으로 제5회 신동엽창작기금과 제5회 만해문학상,
제2회 오영수문학상, 한국일보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 순이삼촌(順伊三寸)

제주도를 떠나 서울에서 지내던 나는 음력 섣달 열여드레인 할아버지의 제사에
참석하기 위해 8년 만에 고향인 제주 서촌마을을 방문한다. 거기서 나는 순이
삼촌(제주에서는 촌수 따지기 어려운 먼 친척어른을 남녀 구분 없이 삼촌이라
부른다)이 죽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30여 년 전의 참혹한 사건을 떠올리게 된다.
순이삼촌은 작년 한해 서울의 우리집에 와서 식모노릇을 하던 분이다. 그녀는
아내와 쌀문제로 말다툼을 하게 되어 제주로 돌아가게 되었는데, 그녀를 데리러
온 사위 장씨로부터 순이삼촌에게 환청증세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순이
삼촌은 몇 년 전에 이웃집에서 메주콩을 잃어버린 일로 시비가 벌어진 적이
있는데, 그때 이웃사람이 경찰서로 가자고 말하자 아무말도 못하고 주저앉아
버리는 바람에 범인으로 오해받으면서 환청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순이삼촌의 파출소 기피증은 30여 년 전의 사건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30여 년
전 그해 음력 12월 19일 국군에 의해 학교운동장에 소집된 마을사람들은 자세
한 영문도 모른 채 무참하게 참살당했다. 군경측의 무리한 작전과 이념에 대한
맹신이 빚어낸 비극적 사건이었다. 그 학살현장에서 두 아이를 잃고 구사일생
으로 살아난 순이삼촌은 그후 경찰에 대한 심한 기피증이 생겼고, 메주콩사건
으로 결벽증까지 생겼으며, 나중에는 환청증세도 겹치게 된 것이다. 평생 그날
의 사건으로 인한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던 순이삼촌은 자식이 둘이나 묻힌
그 옴팡밭에서 사람의 뼈와 탄피 등을 골라내며 30년을 과부로 살아오다가 그
날의 일을 환청으로 듣게 되고, 마침내 그 살육의 현장에서 꿩약을 먹고 자살을
하게 된다. 나는 마을사람들이 30년이 지나고도 그 일을 고발하지 못하는 것은
심한 레드 콤플렉스 때문이라고 생각하며, 한달 전에 자살한 순이삼촌의 삶은
이미 30여 년 전의 시간 속에서 정지해버린 유예된 죽음이었다고 생각한다.

1978년 9월 계간지 《창작과 비평》에 발표된 중편소설이다. 이 소설은 실존하
는 역사적 사건이 문학작품으로 형상화됨으로써 문학의 힘이 어떻게 발휘되는
가를 잘 보여주는 사실주의 기법의 작품으로, 1949년 1월 16일 북제주군 조천
면 북촌리에서 벌어진 양민학살을 모델로 삼고 있다. 500여명의 주민이 군인에
의해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학살된 소위 '북촌리 사건'을 주요 배경으로 하고
거기에 작가의 고향인 노형리의 체험을 함께 섞어 가공한 사실주의 기법의 작품
이다. 제주도 출신의 작가 현기영은 그 학살현장에서 극적으로 살아난 순이삼촌
의 삶이 어떻게 황폐화되어 가는가를 보여줌으로써, 4·3사건의 참혹상과 그 후유
증을 고발함과 동시에 30여 년 동안이나 묻혀 있던 사건의 진실을 문학을 통해
공론화시켰다. 이 작품은 4·3사건을 민중적 시각에서 조명해 역사적 사실 이면에
숨겨진 진실을 최초로 문학의 영역에서 논의함으로써, 문학사적·역사적 의의가
큰 1970년대의 대표적인 문제소설로 꼽힌다. 제4공화국 시절에 이 소설을 발표
한 작가는 고문과 금서조치를 당하는 등 개인적으로 큰 고초를 겪었지만 이 작
품을 계기로 4·3사건에 대한 연구가 활발히 전개되고, 문학을 비롯해 미술·연극
계 등 문화계 전반에 걸쳐 큰 영향을 끼친 것으로 평가된다.

 ▷ 작가의 강연(발췌)

-제주도의 참된 역사를 되찾기 위해-

저는 제주도 출신입니다. 1948년 제주도에서는 4·3항쟁이 일어났고, 그 항쟁을
무자비하게 진압하는 과정에서 그 당시 25만 도민 중에서 3만 가까운 양민들이
학살을 당했습니다. 저는 등단 이후 적잖은 기간 동안 제주도민의 한에 대해서
글을 써왔습니다. 벌써 반세기가 지난 오늘의 시점에서 보면, 어렸을 때 참담한
분단 체험을 한 분들도 계시고 미체험 세대도 있을 것입니다. 작년에 이루어졌
던 남북 이산가족 상봉 장면에서 저는 세대간에 대단히 이질적인 단층을 노정
시킨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저녁의 황금시간대에 2, 3일 동안 내내
민족의 대서사시라고 할 만한 이산가족 상봉 드라마를 방영했는데, 눈이 벌개
진 부모 세대와는 달리 따분하다고 화까지 내는 젊은이들이 적지 않았고, 인터
넷상에도 이에 항의하는 글들이 많이 올라왔다고 합니다. 젊은 층들로서는 "우
리가 좋아하는 젊은 가수들의 발랄한 무대를 취소시키고 이상한 눈물을 쏟는
장면만 내보내느냐"는 불만이 적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거기에서 부모 세대와 자녀들 세대 사이에 큰 단절감을 느꼈던 것으로 보도되
었던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거실 TV 앞에 앉아서 노소의 가족의 함께 앉았지
만, 너무 오랫동안 헤어졌다가 만나기 장면을 보면서 기가 막힌 나머지 부모와
조부모는 하염없이 눈물을 쏟는데, 아이들에게는 그것이 감흥으로 다가오지
않았던 겁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왜 그런 현상이 벌어졌는지를 곰곰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저는 우선 이것은 정체성의 문제라고 봅니다. 우리가 공동체 공간 속에서 살아
가고 있다면 대한민국국민으로서 정체성이 있어야 합니다. 공동체의 과거 역사
를 계속 기억하고 있어야 되는데, 젊은 세대는 우리 민족 공동체의 과거를 학교
교실에서 배웠지만 얼마 가지 않아 잊어버리고 맙니다. 요즘 소비적 향락 문화
가 젊은이들 차이에 팽배하다 보니, 머릿속에는 온갖 그런 이상한 정보로 가득
차 버리기 마련입니다. 거기에는 우리 민족 공동체가 걸어온 피어린 과거의 기
억이 자리잡을 공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단절현상이 오는
것입니다. 남북으로만 이산가족이 갈라져 있는 것이 아니라 한 지붕 아래 한가
족 내에서도 이산가족이 생기고 만 것입니다.  

세대와 세대 사이에도 분단과 이산이 되어 있습니다. 애들이 골방에 들어가서
무엇을 하는지 나오라고 해도 나오지도 않는 것이 단절현상입니다. 인터넷상의
온갖 위험스러운 사이트에 접하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부모들의 입장에
서는 걱정스러운 일입니다. 저는 공동체의 정체성이 이렇게 분할이 되어 있다고
진단하면서, 이제부터라도 기억의 재생 작업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우리의 역사
도제대로 챙기지 못하면서, 과거를 망각하고 잘못된 역사를 정당화시킨 일본 교
과서를 큰 소리로 문제삼을 수 있겠습니까.  

오늘의 시점에서도 우리의 역사는 크게 왜곡되어 있습니다. 전후사정을 돌아보
지도 않고 군부독재도 옳다는 평가가 횡행하는 등 역사가 제대로 정립이 되어
있지 않습니다. 역사의 매 단계마다 반성과 비판을 해서 정리가 되어야 되는데,
민족의 역사를 말살하려 들었음은 물론 가렴주구를 일삼던 일제로부터 가까스
로 해방이 되고 나서도, 동족을 사지로 내몰면서 친일을 일삼은 친일파들에 대
해서 어떤 비판, 반성을 요구하는 것이 없이 오히려 기득권을 준 것은 참으로 통
탄할 일입니다. 우리는이렇듯 역사의 매 단계마다 제대로 반성과 정리를 해본 적
이 없이 넘어오곤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교과서가 만신창이입니다.

우리는 지금부터라도 정당성 없는 관권의 폭거로 인해 망각된 역사의 기억을 되
살리면서, 올바른 역사를 세워야 합니다. 제가 바로 얼마 전까지 제주도 4·3 항쟁
을 화두로 삼아서 소설 작업을 해온 것도 그 일환입니다. 거의 20년 가까이 거기
에 매달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러나 독자들 가운데에는 '재주가 있어
보이는데 엉뚱한 곳에 공력을 허비하고 있다'고 아쉬워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또 평론가들 가운데에는 "뭐 아직도 4·3이냐. 세월이 얼마나 흘렀는데…" 하면서
코웃음을 치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제주도 태생인 저의 입장에서는 다릅니다. 제 고향의 슬픈 이야기는 반세
기가 지나도록 역사의 장에 올라보지도 못했을 뿐더러, 얼마 전에야 겨우 올랐다
해도 '4·3 폭동'이라고 왜곡되어 실려 있습니다. 이런 명백하고도 뿌리 깊은 왜곡
이 있어 왔음에도 불구하고, 펜대를 쥐었던 사람들이 역사적 진실에의 탐구는 젖
혀둔 채 음풍농월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입니다. 저도 청운의 꿈은 품고 문학에 입
문할 무렵에는 순수문학을 하려고 했었습니다. 1975년에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막
상 데뷔를 하고 보니까, 제주도 출신인 저로서는 48년 4월 3일에 있었던, 그리고
그 이후에 있었던 긴 수난의 역사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4·3은 역대 정권에 의하여 꾸준히 금기의 영역으로 묶여 왔습니다. 우리는 그 동안
거기에 발을 들여놓으면 부비트랩을 밟은 것처럼 반드시 상해를 입게 되어 있었습
니다. 제주 4·3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감옥에 가고 고문을 당했는지 모릅니
다. 제가 4·3의 금기영역에 도전할 때에는 아직 젊은 시절이어서, 가해자에게도 어
떤 선한 면이 있다는 식의 장치까지 쓰면서 [순이 삼촌]이라는 작품을 썼는데, 19
78년이었습니다. 그 다음에 4·3 연작을 이어서 두 편을 더 쓰고 다른 소설도 써서
1979년에 단행본이 나왔습니다. 그때가 12월이었는데 유신 독재의 핵심인 박정희
씨가 시해당하고 신군부가 등장할 무렵이었습니다. 나오자마자 그 책이 문제가 되
어서 잡혀가 고문을 엄청나게 당했습니다. 사흘 정도 고문을 당했는데 반공법에
묶이는 걸로 생각했습니다. 그 와중에서도 저는 변호사를 사면 법정을 통해서
'4·3이란 무엇인가'가 대두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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