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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1/8/12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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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

 ▷광주의 지산재(芝山齋)

광주광역시 남구 양과동에는 고운 최치원의 사우인 지산재(芝山齋)가 있다.
영조13년(1737년)에 처음 세웠고 1922년에 중건한 건물로 정면 4칸의 지산
재와 내외삼문, 영당 등이 있다.

최치원(857∼?)은 신라 말기의 학자요 문장가이다.
본관은 경주(慶州)이고 자는 고운(孤雲) 혹은 해운(海雲)
이며 경주 사량부(沙梁部) 출신이다. 최치원은 퇴위하고자
하는 진성여왕과 그 뒤를 이어 새로이 즉위한 효공왕을
위하여 각각 대리 작성한 상표문(上表文)에서 신라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멸망의 길로 들어서고 었던 것을 박진감
나게 묘사하였다. 쇠락해가는 신라왕실에 대한 실망과
좌절감을 느낀 나머지 40여세 장년의 나이로 관직을 버리
고 소요하다가 마침내 은거를 결심하였다. 당시의 사회적
현실과 자신의 정치적 이상과의 사이에서 빚어지는 심각한
고민을 해결하지 못하고 결국 은퇴의 길을 택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 같다.

즐겨 찾은 곳은 경주의 남산(南山), 강주(剛州: 지금의 義城)
의 빙산(氷山), 합천(陜川)의 청량사(淸凉寺), 지리산의
쌍계사(雙磎寺), 합포현(合浦縣: 지금의 昌原)의 별서(別墅)
등이었다고 하는데, 이밖에도 동래(東萊)의 해운대(海雲臺)를 비롯하여 그의 발자취가
머물렀다고 전하는 곳이 여러 곳 있다.

만년에는 승려 현준(賢俊) 및 정현사(定玄師)와 함께 가야산 해인사에
들어가 머물렀다.

해인사에서 언제 세상을 떠났는지 알 길이 없으나, 그가 지은 〈신라수창군호국
성팔각등루기 新羅壽昌郡護國城八角燈樓記〉에 의하면 908년(효공왕 12)말까지
생존하였던 것은 분명하다. 그 뒤의 행적은 전혀 알 수 없으나, 산수간에서 방랑
하다가 죽었다고도 하며 혹은 신선이 되었다는 속설도 전해오고 있으나, 자살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새로운 주장도 있다.

 ▷지산재 가는 길

광주시 남구 양과동 소재. 광주-나주 간 도로변의 동편에 있음.

 ▷정읍의 무성서원 (武城書院)

정읍시 칠보면 무성리 500번지에 1483년(조선 성종 14)에 중건한 무성서원이
있다.

이 건물은 신라말(新羅末)의 유현(儒賢)인 고운 최치원(孤雲 崔致遠)과 조선
중종(中宗)때 태인현감(泰仁縣監)이었던 신 잠(申 潛)을 향사(享祀)하기 위해
세운 서원이다.

원래는 태산서원(泰山書院)이라 하던 것을 숙종(肅宗) 22년(1696)에 사액(賜額)
됨으로써 무성서원(武城書院)이라 하게 되었다.

사우(祠宇)에는 최치원(崔致遠)을 비롯하여 신 잠(申 潛), 정극인(丁克仁), 송세
림(宋世琳), 정언충(鄭彦忠), 김약묵(金若默), 김 관(金 灌) 등의 향현(鄕賢)을
배향(配享)하였다. 현존 건물로는 현가루(絃歌樓)를 비롯하여 강당(講堂), 동서
재(東西齎), 사우(祠宇), 비각(碑閣) 등이 있다.

사우는 성종(成宗) 15년(1484)에 세워진 것이나 헌종(憲宗) 10년(1844)에 중수
(重修)되었고, 강당은 순조(純祖) 25년(1825)에 불에 타 없어진 것을 순조(純祖)
28년(1828)에 중건하였다.

이 서원에는 성종(成宗) 17년(1486) 이후의 봉심안(奉審案), 강안(講案), 심원록
(尋院錄), 원규(院規) 등의 귀중한 서원 연구자료가 보존되어 있다.

신라(新羅)시대 대문호(大文豪)이며 정치가(政治家)였던 고운 최치원(孤雲 崔致遠)
이 신라 정강왕(定康王) 1년에 태산군수(泰山郡守: 지금의 泰仁)로 와서 있는 동안
치적(治積)이 뛰어나서 군민의 칭송을 받다가 합천(陜川)군수로 떠나게 되니 그를
흠모하는 나머지 선생의 생전(生前)에 월연대(月延臺: 지금의 칠보면 무성리 성황
산의 서쪽 능선)에 생사당(生祠堂: 생존하고 있는 사람을 모시는 사당)을 세우고
태산사(泰山祠)라 부른 것이 시초였다.

                                     <무성서원>

이 사당은 고려(高麗) 말에 훼파(毁破)되었다가 이조(李朝) 성종(成宗) 14년(1483.
정극인 선생 사후 2년)에 유림(儒林)들의 발의로 월연대에서 지금의 자리로 옮겼으며
지금의 그 자리에는 불우헌 정극인(不憂軒 丁克仁)이 창설한 향학당(鄕學堂)이 있었
다는 전설도 있다.

그 뒤 이조 중종 39년(1544)에 태인 현감(泰仁 縣監)이던 영천 신 잠(靈川 申潛)이
부임하여 7년 동안 선정(善政)을 베풀다가 동 서 남 북 학당(東 西 南 北 學堂)을 세
우는 등 많은 치적을 남기고 명종 4년(明宗 1549)에 강원도 간성(杆城)군수로 이임
하니 역시 주민들이 그를 사모하여 생사당(生祠堂)을 세우게 되었다.

숙종 22년(肅宗 1696)에 무성(武城)이라는 사액(賜額)을 받아 이 두 사당(祠堂)을
병합하여 무성서원(武城書院)이라 했으며, 삼현(三賢)을 더 모시다가 뒤에 두 분을
더 모시니 칠 현(七賢)을 더 배향(配享)하게 되었다.

                               <피향정-태인>

배향된 분은 고운 최치원(孤雲 崔致遠), 영천 신 잠(靈川 申潛), 불우헌 정극인(不憂軒
丁克仁), 눌암 송세림(訥菴 宋世琳), 묵재 정언충(默齋 鄭彦忠), 성재 김약묵(誠齋
金若默), 명천 김 관(鳴川 金 灌) 등이다.

그 뒤 정조(正祖) 8년(1784)에 쌍계사(雙溪寺)로부터 최치원의 영정(影幀)을 모시었다.
이 서원은 고종(高宗) 5년(1868)에 대원군(大院君)의 서원 철폐령(撤廢令)에 의해서
위기 에 처했으나 당시의 현감, 유림(縣監, 儒林) 등이 청원하여 화를 모면했을 뿐
아니라 전라도(全羅道)의 철폐령에서 제외된 세 개(三個) 서원으로 필암(筆巖),
포충(褒忠), 무성(武城)서원 중 하나이고 원노(院奴) 30명, 세미(稅米) 3결(結:
약 9,000평)을 보조 받기에 이르렀다.

현재 건물로는 사우(祠宇) 3칸, 명륜당(明倫堂) 5칸, 현가루(絃歌樓) 2층 3칸,
장수재(莊修齋) 4칸, 흥학당(興學堂) 4칸, 서호순비각(徐灝淳碑閣) 1칸, 고사
(庫舍) 3칸 등이며 1992 년에 병오창의기적비(丙午倡義紀蹟碑)를 김성년(金成淵)
정읍군수(井邑郡守)가 세웠다. 문루(門樓)인 현가루(絃歌樓)는 원주(圓柱)를
세운 2층으로 된 기와집이며 문을 들어서면 정면 5칸, 측면 2칸의 강당(講堂)이
있고 3칸 대청(大廳)과 그 좌우에는 단칸의 협실(夾室) 이 있으며 동서재(東西齋)인
장수재(莊修齋)와 흥학재(興學齋)가 있다.

사우는 성종 15년에 지었으나 현재의 것은 1844년에 중수한 것이며 강당은 1825년에
불에 타 없어졌던 것을 1828년에 다시 지은 건물이다.

동서재(東西齋)도 숙종(肅宗)때 건립하였으나 현재의 건물은 그 뒤 중수한 것이다.
사우(祠宇)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것의 하나이며 이 서원에는 성종(成宗)
17년 (1486) 이후의 봉심안(奉審案), 강안(講案), 심원록(尋院錄), 원규(院規) 등의
서원연구(書院硏究)의 자료가 보존되어 있다.

 ▷무성서원 가는 길

 전북 정읍시 칠보면 무성리 500번지
 

  저술

저술로는 시문집으로 《계원필경》 20권, 《금체시》 5수 1권, 《오언칠언금체시》
100수 1권, 《잡시부》 30수 1권, 《중산복궤집》 1부 5권, 《사륙집 四六集》 1권,
문집 30권 등이 있었고, 사서(史書)로는 《제왕연대력》이 있었으며, 불교에 관계되는
저술로는 《부석존자전》 1권, 《법장화상전》 1권과 《석이정전》 《석순응전》
《사산비명 四山碑銘》 등이 있었으나 오늘날 전하는 것은 《계원필경》 《법장화상전》
《사상비명》뿐이고, 그 외는 《동문선》에 시문 약간, 사기(寺記) 등에 기(記) 원문(願文)
찬(讚) 등 그 편린만이 전할 뿐이다.

 ▷한시 추야우중(秋夜雨中)

秋風唯苦吟 世路少知音 窓外三更雨 燈前萬里心
(추풍유고음 세로소지음 창외삼경우 등전만리심)

가을 바람에 괴로이 읊나니 세상에 나를 알 이 적구나
창밖에 쓸쓸히 밤비 내리고 등 앞의 마음 만리를 달리네

 격황소서(檄黃巢書)

광명(廣明) 2년 7월 8일 제도도통검교태위(諸道都統檢校太尉) 모(某)는 황소에게 고하노니,
대저 바른 것을 지키고 떳떳함을 닦음을 도(道)라 하고 위태로움에 임해서 변통할 줄 아는
것을 권(權)이라 한다.

슬기 있는 이는 시기에 순응하여 성취하고, 어리석은 자는 이치를 거역하다가 실패하게
된다. 그런즉 백년의 생명이지만 살고 죽는 것을 기약하기 어렵고, 만 가지 일은 마음이
주인임에 옳고 그른 것을 분별할 수 있다. 이제 내가 왕사(王師)로서 정벌함은 있으나
싸우지는 않고, 군정은 먼저 은혜를 베풀고 베어 죽이는 것은 뒤로 한다.

장차 상경(上京)을 수복하고 진실로 큰 믿음을 펴려고 함에 공경스럽게 황제의 유시를
받들어 간사한 꾀를 쳐부수려고 한다.

또 너는 본래 먼 시골 구석의 백성으로 갑자기 억센 도적이 되어, 우연히 시세를 타고,
문득 감히 떳떳한 기강을 어지럽게 하며 드디어 불측한 마음을 가지고 황제의 자리를
노리며 성궐을 침범하고 궁궐을 더럽혔으니 이미 죄는 하늘에 닿을 만큼 지극하였으니
반드시 여지없이 패하여 다시 일어나지 못할 것은 분명하다. (이하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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