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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1/8/12부터
 오늘: 24 전체: 1428442

 

허균의 홍길동전

허 균(許均, 1569∼1618)

자는 단보(端甫), 호는 교산(蛟山)으로 백월거사(白月居士)로도 썼다.

허엽의 셋째 아들로 태어나 선조 27년(1594)에 문과에 급제, 1597년
문과 중시에 장원, 내외직을 역임한 후 벼슬이 좌참찬에 까지 올랐고,
정부사로 명나라에 다섯차례나 다녀왔다.

시문에 뛰어났고, 소설, 희곡, 비평 등에도 조예가 깊었으며 최초의
한글소설인『홍길동전』과 문집인 『성소부부고』우리나라 최초의
시 평론집인『학산초담』과 『성수시화』등이 있다.

20년 전의 병자호란 예언과 그 대비책 그리고 바른 피난길의 제시,
최초로 천주교 서적을 가져와 천주교를 처음 소개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 등 허균은 예사롭지 않은 삶을 살았다. 사회제도의 모순과 정치적
부패상을 질타하고, 정치사회개혁을 주창하는 등 실천적 삶을 살다
정치적인 음해로 인하여 목숨을 잃게 되었다. 개혁적인 정치사상가,
국방이론가, 진보적 종교가 문학가 등으로 불린다.

  <강릉시 초당동에 있는 생가와 용인시에 있는 가묘>

홍길동전(洪吉童傳)

작품의 최초의 국문 소설로서 홍길동이라는 영웅이 적서 차별과
봉건 지배 체제의 제 모순에 대해 저항하며 활빈당을 이끌어 조정과
대결하고 그 모순의 극복 형태로서 조선을 떠나 율도국을 건설하기에
이르는 내용의 영웅 소설에 해당한다.

또한 이 작품은 김시습의 '금오신화' 이후 비교적 사실적 묘사를 통해
가전(假傳)적, 또는 전기(傳奇)적 성격을 탈피한 국문학상 비로소 소설
다운 형태를 갖춘 소설이라 일컬을 수 있다.

임란 이후 문란했던 정치와 사회상을 반영하고 서민적 고발 의식을
수용한 점과 영웅의 일생이 전형적으로 그려져 있다는 점에서 문학사
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의의를 갖는 작품이다.

▷ 홍길동전의 줄거리

명문 거족인 홍판서와 계집종 춘섬 사이에서 길동이 태어난다.
길동은 총명이 뛰어나지만, 천비 소생이라서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형을 형이라 부르지도 못하는 것을 원통하게 생각한다.

 

부친은 서자로서 뛰어난 능력을 갖춘 것이 화를 부를까 근심하지만,
길동은 병법과 도술 연마에 힘쓴다. 홍판서의 또 다른 첩 초란이 흉계를
꾸며 길동을 죽이려다가 실패하고 위기를 면한 길동이 집을 떠나려 하자
홍 판서가 호부 호형할 것을 허락한다.

 

부모와 헤어진 길동은 도적의 소굴에 들어가 힘겨루기를 통하여 그들의
두목이 된다. 길동은 도적들과 기이한 계책으로 해인사의 재물을 탈취하고
이후, 자신들을 활빈당이라 칭하면서 팔도 지방 탐관오리들의 재물을 빼앗
아 빈민들에게 나누어 준다.

 

조정에서는 갖가지 방법으로 길동을 잡으려 하지만, 둔갑술과 축지법 등
초인적인 도술로 조정을 비웃듯 피해 다닌다. 조정에서는 길동의 아버지와
이복형을 인질로 하여 길동을 잡으려 한다.

 

길동이 병조 판서를 시켜 주면 조선을 떠나겠다고 하자 왕은 병조 판서를
시켜주고, 길동은 바다 밖으로 나간다. 길동은 저도에서 요괴를 물리치고
구출한 두 여인을 아내로 맞이하고 율도국을 공격하여 그 왕의 항복을 받고
길동 자신이 율도국의 왕이 된다. 이후 이상적인 국가를 세워 다스리며 부귀
영화를 누리다가 72세에 죽는다.

 

 ▷ 실존인물로 보는 홍길동(전남 장성군청 자료 발췌)

1. 태어난 해 : 1440년(세종22년)

2. 태어난 곳 : 전라도 장성현 아치곡(아치실)→ 오늘날의
                  전남 장성군 황룡면 아곡1리 아치실

3. 홍길동의 활동(국내)

 가) 청년기 1460년(세조6년) ∼ 1470(성종1년)

서얼의 관리등용을 금지 하는 경국대전의 반포로 과거시험을
포기하고 집을 떠나 나주목 관할 장성현, 갈재(葦嶺)를 중심
으로 활동하다가 광주 무등산, 영암 월출산에 본거지를 정하
고 주로 탐관오리와 토호의 재산을 빼앗아 가난한 백성에게
나눠주는 의적 활빈 활동을 하였다.

그후 지리산 근처의 경상도 하동군 화계현 보리암자에 지휘부를 두고 관군과
대항하였으며, 멀리 경상도 진주에까지 세력을 펼쳤다. 그후 김천 황악산에
들어가 학조대사에게서 병법과 무술을 배웠다.

장영기(張永己)라는 이름으로 변성하였으며, 전국 팔도(八道) 시장에 첩자를
파견하여 민심을 파악하였다. 그러던 중 1469년(예종 1년) 10월 정부의 대대
적인 토벌작전으로 활동 무대를 서남해안의 섬으로 옮기게 된다.

 나) 장년기 1471년(성종 2년) ∼ 1500년(연산군 6년)

관군에 좇겨 1469년 11월 중순에 전라도 영광 다경포(현재의 법성포)근처의
영평곶에서 배를 타고 나주 압해도(신안군 압해도)쪽으로 활동 근거지를 옮
기게 된다.

이로써 활동범위가 육지에서 바다로 바뀌게 되는데, 이는 훗날 뱃길로 3천리나
떨어진 일본 오키나와에 율도국이라는 해상왕국을 건설하는 계기가 된다. 특히,
이 시기에는 집단공동체 생활을 하면서 직접 농사도 짓고 염전을 경작하고 어업
활동을 했으며 상업활동(시장에서의 장사)까지 영위하면서 부패한 정부와 관료
를 상대로 반봉건 투쟁을 벌였다.

4. 해외 활동기(오키나와 열도, 동중국해)

 가) 1500년 12월 5일

 하떼루마지마(파조간도) 정착

 나) 1609년

일본 본도의 싸쓰마번(임진, 정유재란시 조선인의 코와 귀를 가장 많이 베어간 인물임)
의 유구국 침공으로 오키나와 열도의 지배권이 일본에 넘어감. 이로 인해 홍길동이 세
운 오키나와 열도의 해상왕국도 복속됨.

 다) 1612년

홍길동의 후예들이 고국인 조선으로 돌아오기 위해 탈출망명을 시도하여 배를 타고
경상도 앞바다에 도착, 그런데 조정에서는 이들을 일본군의 재침공으로 오인하여
한양(서울)일대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대부분의 벼슬아치들이 피난길에 올라
서울장안이 텅빔.

5. 일본에 남아있는 홍길동의 유적지

 가) 하떼루마지마(파조간도)

- 홍길동 도래 기념비(현지에서는 탄생기념비라고 명기됨)
- 홍길동의 처남인 장전대주의 영웅기념비
- 모자(母子) 이별 제단(홍길동이 그의 어머니와 이별하여 석원도로 진출한 것을 기념)

 나) 오키나와 본도

 - 오키나와 현립 도서관에 각종 문헌 자료 보존

6. 홍길동 집단의 영웅적인 일대기를 기록한 문헌들

 가) 국내  

- 조선왕조실록,택당집, 계서야담, 청구야담, 증보해동이적, 성호사설, 홍길동전,
위도왕전, 만성대동보

 나) 일본  

- 구양, 팔중산 유래기, 팔중산도 연래기, 유구국 유래기, 구지천간절구기, 궁고
 사전, 궁고도 서민사

  다) 중국  

- 명사실록(明史實錄), 명사(明史)

  ▷ 홍길동 생가로 가는 길

장성읍에서 황룡면으로 향하다 오른쪽으로 난 홍길동로를 따라 가면 동학농민
혁명전적지, 필암서원 등이 나온다. 그리고 황룡면 아곡리 아치실에는 홍길동
테마파크 조성사업의 일환으로 홍길동 생가가 복원되어 있다.
홍길동 생가에는 홍길동이 실존인물임을 증명하는 각종 자료의 사본이 비치돼
있다. 또 생가 내에 소설 속의 등장인물인 홍길동의 아버지 홍상직, 생모 춘섬,
홍길동, 하인 등의 모형과 당시 생활 소품과 말 박재, 마구간, 장독대 등을 재현
해 전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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