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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1/8/12부터
 오늘: 54 전체: 1437646

 

김시습(金時習)의 금오신화(金鰲新話)

김시습의 생애

본관은 강릉(江陵). 자는 열경(悅卿). 호는 매월당(梅月堂),
동봉(東峰), 청한자(淸寒子), 벽산(碧山). 법호는 설잠(雪岑).
시호는 청간공(淸簡公).육신(生六臣)중의 한 사람이다.
서울 성균관 부근에 있던 사저(私邸)에서 출생하였으며, 신동
(神童)으로 이름이 높았다.

3세 때 보리를 맷돌에 가는 것을 보고
“비는 아니 오는데 천둥소리 어디서 나는가, 누런 구름 조각조
각 사방으로 흩어지네(無雨雷聲何處動 黃雲片片四方分)”라는
시를 읊었다 하며 5세 때 이 소식을 들은 세종대왕에게 불려가
총애를 듬뿍 받았다고 한다.

15세 되던 해에 어머니를 여의고 외가에 몸을 의탁했으나, 3년이 채 못 되어
외숙모도 별세하여 다시 상경했을 때는 아버지도 중병을 앓고 있었다.

이러한 가정적 역경 속에서 훈련원 도정(都正) 남효례(南孝禮)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였으나 그의 앞길은 순탄하지 못하였다.

이어 삼각산 중흥사(重興寺)에서 공부하다가 수양대군이 단종을 내몰고 왕위에
올랐다는 소식을 듣고 통분하여, 책을 태워버리고 중이 되어 이름을 설잠이라
하고 전국으로 방랑의 길을 떠났다.

북으로 안시향령(安市香嶺), 동으로 금강산과 오대산, 남으로 다도해(多島海)에
이르기까지 9년간을 방랑하면서 《탕유관서록(宕遊關西錄)》 《탕유관동록
(宕遊關東錄)》 《탕유호남록(宕遊湖南錄)》 등을 정리하여 그 후지(後志)를 썼다.

1463년(세조9) 효령대군(孝寧大君)의 권유로 잠시 세조의 불경언해(佛經諺解)
사업을 도와 내불당(內佛堂)에서 교정 일을 보았으나 1465년(세조 11) 다시 경주
남산에 금오산실(金鰲山室)을 짓고 입산하였다.

2년 후 효령대군의 청으로 잠깐 원각사(圓覺寺) 낙성회에 참가한 일이 있으나
누차 세조의 소명(召命)을 받고도 거절, 금오산실에서 한국 최초의 한문소설
금오신화(金鰲新話)》를 지었고, 《산거백영(山居百詠)》(1468)을 썼다.

이곳에서 6∼7년을 보낸 후 다시 상경하여 성동(城東)에서 농사를 지으며
산거백영 후지》(1476)를 썼다.

1481년(성종 12)에 환속(還俗), 안씨(安氏)를 아내로 맞이하였다.
그러나 1483년 다시 서울을 등지고 방랑의 길을 나섰다가 충남 부여(扶餘)의
무량사(無量寺)에서 죽었다.

그는 끝까지 절개를 지켰고, 유 불(儒佛) 정신을 아울러 포섭한 사상과 탁월한
문장으로 일세를 풍미하였다. 1782년(정조 6) 이조판서에 추증, 영월(寧越)의
육신사(六臣祠)에 배향(配享)되었다.

금오신화는 한국 전기체 소설(傳奇體小說)의 효시이다. 여기에는 <만복사저포기
(萬福寺樗蒲記)> <이생규장전(李生窺墻傳)> <취유부벽정기(醉遊浮碧亭記)>
<용궁부연록(龍宮赴宴錄)> <남염부주지(南炎浮洲志)> 등 5편이 수록되어 있다.

 「만복사저포기」의 줄거리

남원지방에 사는 양생이란 노총각이 있었다.
그는 어려서 전란으로 부모를 잃고 만복사의 동쪽방에서 자신의 운명을
한탄하며 외롭게 살고 있었다.

그는 어느날 밤에 부처님 앞에 가서 저포(樗蒲)놀이(주사위 놀이의 일종)를
하자고 제안한다. 혼자서 부처님에게 말하기를 만약 자신이 지면 부처님에게
사례를할 것이니, 부처님이 지면 자신에게 배우자를 점지해 줄 것을 부탁하였다.

그 결과 자기 차례로 정한 것이 이기게 되었다. 때마침 문이 열리는 소리에
부처님 뒤에 가서 숨는다. 방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아름다운 처녀였는데,
그 처녀는 부처님 앞에 와서 자신의 배우자를 점지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이었다.

이에 양생이 나가 자신와 함께 할 것을 말하자, 처녀는 첫마디에 승낙하여,
그 둘은 만복사의 으슥한 방에 들어가 하룻밤을 보냈다. 그 다음날 개령동에 있는
그 처녀의 집에 가서 행복하게 며칠을 보냈다.

어느 날, 그 처녀가 이제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이 다했으니 그만 돌아가 달라고
하며, 며칠 뒤에 보련사 앞에 가면 자신을 만날 수 있을 것이라 하였다. 양생은
하는 수 없이 그녀와 이별하고 재회를 약속하는 의미로 은잔 하나를 징표로 받아
가지고 나왔다. 양생은 약속한 날에 보련사로 가는 길목에서 처녀를 기다렸다.

거기서 딸의 제사를 지내기 위해 절에 가는 그 처녀의 아버지를 만나게 되고,
양생이 갖고 있는 은잔을 통해 그 처녀는 2년전에 왜관에서 난을 만나 죽은
처녀의 영혼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양생은 그 처녀가 죽은 영혼임을 알고서도
사모하는 마음에 그녀가 나타나기를 기다리니 과연 그 처녀가 나타났다.
그들은 같이 보련사로 가서 제사밥을 먹고, 절방으로 들어가 하룻밤을 보냈다.

그러나 처녀의 부모들은 그녀를 볼 수 없고, 다만 법먹는 소리와 밤에 속삭이는
소리만 들을 수 있었다. 양생은 그 이튿날 그 처자와 영원히 이별하게 되었다.

그는 그 처녀의 부모가 주는 재산을 다 팔아 날마다 절에서 제를 올렸다.
하루는 그 처녀의 혼이 나타나서 '당신의 공덕으로 이제 선국에 환생하게 되었다'는
말을 하였다. 이에 양생은 지리산에 들어갔는데, 그 뒤에 그를 본 사람이 없다고 한다.

 ▷ 만복사지(萬福寺趾)

만복사는 고려 문종때 창건되었다는 설과 신라말 도선국사가 진압사찰로 창건했다는
설이 있는데 정유재란 때 소실되어 지금은 절터 일부만 발굴한 상태다.

이곳에는 5층석탑(보물 제32호)과 석좌(보물 제31호), 당간지주(보물 제32호)
석불입상(보물제43호), 석인상 등의 유물들이 남아 당시의 절 규모를 추측하게
해준다.(사적 제349호)

                                         <만복사지 전경>

                                      <당간지주와 석불>

                                             <석 좌>

 ▷ 찾아 가는 길

위치 : 전북 남원시 왕정동 481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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