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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1/8/12부터
 오늘: 38 전체: 1413552

 

백광홍의 관서별곡

백광홍(白光弘, 1522-1556)

조선 시대 중기 문인. 장흥군 안양면 기산
리 출생. 호는 기봉(岐峰). 아우 백광훈(최경
창, 이달과 함께 삼당시인)과 함께 문장으로
이름이 났었음.
본디 타고난 성품이 총명영특하고 배움에 슬
기로웠고 지혜로웠으며 우의가 돈독하였다.

어려서 일재 이항(一齎 李恒)에게 글을 배우고,
하서 김인후(河西 金麟厚)  율곡이이(栗谷 李
珥)  영천 신잠(靈川 申潛)  고봉 기대승(高峰
奇大升)  석천 임억령(石川 林億齡)  송강 정
철(松江 鄭澈)  송천 양응정(松川 梁應鼎)  고
죽 최경창(高竹 崔慶昌) 등과 교류하면서 문
재와 학덕이 크게 완성되었다.

1549년(명종4) 28세에 사마양시(司馬兩試)에
급제하고 1552(명종7) 31세 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정자(弘文館正字)로 임명되었다.
그 당시 호남과 영남의 문신으로서 성균관에서 시재(試才) 겨루기를 하게 되자
기봉이 시부동지(時賦冬至)로 으뜸을 차지하여 선시(選時) 10권을 특사 받았고,
다음해에 호당(湖當)에 선발되었다.

1555년(명종10) 34세 때 평안도 평사(評事)가 되어 서도(西道)의 국경방비 지역
에서 민폐를 보살피며 관서별곡(關西別曲)을 지었다.

1556년 (명종11) 나이 35세에 병환이 생겨 평안도 평사 자리를 내어놓고 고향으로
내려오는 도중 전북 부안 사위의 집에서 불귀의 객이 되었다.

선생은 한시인(漢詩人)으로서 보다 관서별곡에 의해 가사문학가로 더 유명하게
알려지게 되었다. 함께 교류관계를 가졌던 고죽(孤竹) 최경창은 선생의 관서별곡을 접하
고 다음과 같이 읊었다.

錦繡煙花依舊色   수놓은 비단같은 아지랑이 속의 꽃은 옛모습 그대로이고
綾羅芳草至今春   능라같이 부드럽고 꽃다운 풀은 오늘도 봄이로구나
仙郞去後無消息   신선같은 그대 떠난 뒤 소식이 없으니
一曲關西淚滿巾   한가락의 관서별곡에 눈물이 수건에 가득하여라

이렇듯 당시 관서별곡에 대한 칭찬이 잦았으나 일찍이 세상을 떠남으로 크게 빛을
보지 못하였다. 선생의 관서별곡은 정송강의 관동별곡보다 25년을 앞서 불려지고
두 선생간에 교류가 있었던 점으로 보아 관동별곡을 짓는데 구성과 표현수법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고 학자들은 평가하고 있다.

관서별곡과 관동별곡의 비교

관서별곡

관서 명승지에 왕명으로 보내실제

행장을 다사리니 칼하나 뿐이로다

연소문 내달아 모화고개 너머드니

귀심이 빠르거니 고향을 사념하랴

관동별곡

강호에 병이 깊어 죽림에 누었더니

관동팔백리에 방면을 맛디시니

어와 성은이야 가디록 망극하다

연추문 들이달아 경회남문 바라보니

하직하고 물러나니 옥절이 앞에 섯다

▷ 유적지

장흥군 안양면 기산리에는 기양사가 있다.
 
 
 

백광훈(白光勳,1537∼1592년)

조선 16세기 임안로, 허황 등이 중종의 문정왕후를 폐하려다 실패하여 폐사되거나
귀양을 가게 된 어지러운 시절, 문학인들은 이런 사회 풍조에 맞춰 지팡이 하나에
짚신을 걸머지고 팔도의 명산대천을 유랑하며 어지러운 세상과 나라의 앞일을
문장으로 토해내는 유랑문학을 태동시켰으니... 그 대표적인 시인 중 한사람이
옥봉 백광훈이다.

그의 맏형인 광홍(光弘)은 관서별곡의 저자로 유명하고 둘째 광안(光顔), 사촌
광성(光城)이 모두 특출해 당시 사람들은 이들을 일문사문장(一門四文章), 사촌
광성(光城)이라 불렀다.

옥봉은 1537년 장흥군 안양면 기산리 출생으로 조상들의 높은 학문적 업적과 가풍
을 이어받아 평생을 방랑시인으로 유랑하여 저항의식을 화선지에 토해냈다.

13세 나이로 문장가들에게 사사받았고 27세 때에야 아버지의 권유로 과거를 봐
진사가 되지만 입신양면의 꿈을 버리고 야인의 길을 걸었다.

비범함을 높이 인정받았던 옥봉은 여러 차례 추천을 받아 관직이 내려지자 41세
때 선릉참봉을 제수받아 나아갔고 44세 때 박순의 후원에 힘입어 예빈사참봉겸
감조관으로 일했다.

옥봉이 남긴 대표 문집인 옥봉집에는 모두 5백 4수의 시가 실렸는데 애틋한 향수와
자연을 초연하게 바로 보는 관조미가 넘치고 있다.

봄산의 고사리만 보아도 고향에 돌아가고 싶은 것을 어찌 하리오 할 정도로 애수를
남긴 옥봉은 일찍 모친을 여의고(9세) 첫 아내를 젊어서(27세) 사별한데다 빈한한
가세 속에서 병약한 아내와 형제의 우애를 염려하던 인간적 배경이 그의 시에 짙게
깔려있다.

글공부를 위해 옥천면 대산마을로 들어와 후에 차남인 진남에게 지금의 터로 나가
살 것을 명해 아버지의 유업을 옥천면 송산리로 모셔와 정착했다.

현재 옥봉의 유품은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 18호로 지정돼 해남군 옥천면 송산리
유물관에 소장되어 있고 지난 81년에 지어진 사당도 여기 있다.

▷ 옥봉유물관  가는 길

전남 해남군 옥천면 송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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