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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리자 (2015-08-26 07:34:10, Hit : 2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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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산마을 명옥헌, 눈으로 가는 길


후산마을 명옥헌, 눈으로 가는 길

후산 마을 늙은 어머니들 아침부터 바지런을 떤다. 오직 한길인 마을 진입로에 일찍부터 출입막는 사슬 잡고 있지 않으면 마을 사람들 하루가 힘들다. 그것은 오로지 붉게 타오른 배롱나무 덕분이다. 예전에는 그 꽃 활짝 펴도 찾아오는 이들 많지 않았는데, 90년대 중반부터 부쩍 늘었다. 아니 꽃필 때만 그런게 아니라 꽃이 있으나 없으나 사람들의 왕래가 잦아졌다. 동네 사람들 모두 대처로 돈 벌러 가더라도 몇뙈기 안되는 옥답 지키거나, 뒷산의 감나무밭 지켜려는 이들 남아 서럽지만 그 틈을 메꾸려는지 몰려드는 사람들 행렬이 초기에는 좋았다. 하지만 시간 흐르니 그들과 후산 사람들 사이 삶의 언어가 중단 되어 있었다.

 관광객이나 답사객이라고 말하는 이들의 관심은 마을이나 사람들 삶에 있지 않았다. 오로지 배롱나무 숲의 잔치와 벌써 오래전에 돌아가신 오희도나 오명중에 맞춰 있었다.

 그렇게 관광은 삶의 본질로 다가감에도 불구하고 기존의 삶을 부인하며 곁가지로만 흐른다. 진정한 삶으로 진입이 어려운 관광인지라 여행길의 들뜬 마음을 포섭하는 각종의 장치에 스르르 무너지고 만다. 유흥업소와 향락업소·사행업소가 관광지에 많은 것은 그런 탓이다. 명옥헌은 관광지는 아니다. 그럼에도 수많은 관광객들이 마을을 헤집고 가장 끝자락에 있는 배롱나무의 꽃대궐을 찾는다. 대체 여기는 별유천지비인간과 같은 무릉도원이 여름 한철 장관을 이루고 있다. 왜 여기 이런 곳이 조성되었을까 근원을 찾아가 보자. 

 후산의 선비 오희도

 명곡 오희도(1583-1623)는 서생이었다. 밝고 온화한 성품에 부모를 극진히 모셨던 효자이자 선비였다. 또한 그가 가진 재능을 후진 양성을 통해 나누려 했던 사부이기도 했다. 그가 사는 집 곁에는 은행나무가 있었고 오동나무도 있었다. 은행나무는 남녀를 구별할 줄 알며, 너른 그늘을 만들어 그 아래서 공부하기에 적절한 공간을 제공해 준다. 해서 공자는 그런 은행나무 아래서 강학을 펼쳤다 전하고, 이를 행단이라고 한다. 오동나무는 봉황의 나무다. 상상속의 새 봉황은 나라가 태평성대일 때 나타난다. 대숲의 죽실을 먹고, 오동나무에 머무르며, 동쪽의 맑은 물인 예천을 먹고 산다.

 태평연월을 기다리며 학문에 매진하는 오희도의 모습은 두 나무가 대변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그를 눈여겨 본 이가 있다. 바로 호남 창의군의 맹장 제봉 고경명의 손자 월봉 고부천이었다. 바로 인접한 창평읍에 살았던 고부천은 심지가 곧고 학문이 가득하며, 명징한 오희도를 늘 마음에 새겨 두었다. 어느 날 새로운 세상을 도모하는 능양군(훗날 인조)이 고부천의 집에 들렀다. 능양군과 주고받는 이야기 속에 군왕의 꿈을 꾸고 있음을 안 고부천, 하지만 그는 거사에 나설 여건이 되지 않았다. 대신에 후산마을의 오희도를 천거했다. 능양군은 말고삐를 잡고 후산마을로 오희도를 찾았다. 하지만 오희도에게도 나서지 못하는 사정이 있었다. 바로 노모를 봉양하지 않으면 안되기에 차마 집을 나설 수 없었던 것이었다. 능양군의 이런 오희도의 극진한 마음을 알면서도 은행나무에 말을 걸어놓고 또 오희도를 찾았다. 출사표를 던지고 싶지만 그러지 못했던 오희도는 그가 나서는 대신에 나주의 지사를 천거한다. 박효립이었다. 아쉬움을 달래고 능양군은 나주의 박효립을 찾았고 의기투합한 이들은 한양에서 각자의 일을 도모할 수 있었다.

 거사 당일 박효립은 왕궁으로 들어가는 금호문을 지키는 수장으로 재직하며 문을 활짝 열고 능양군의 부대를 맞이해 주었던 것이다. 오희도는 그 일의 핵심에 든 사람이면서도 후산을 떠나지 않고 모친을 봉양하며 그렇게 지냈던 것이다. 그런 증거가 명옥헌 정자에 ‘삼고(三顧)’라는 현판으로 남아있다. 제갈공명을 찾아 유비가 세 번을 방문했던 고사가 이 명옥헌에서 증언하고 있는 것이다. 

 선비 출사의 길에 나서다.

 왕이 된 능양군은 그가 만났던 선비 오희도를 잊지 못했다. 세상을 두루 꿰뚫는 안목과 맑고 깨끗한 심성을 갖춘 그를 조정으로 불러들이고자 했다. 난세에는 벌레처럼 움추릴줄 알고 세상을 만나면 대붕처럼 큰 날개를 펼줄 아는 선비를 모른체 할 수 없었던 것이다.

 망제를 짓고 후진을 양성하고 있는 오희도에게 왕의 전갈이 다가왔다. 오희도는 행장을 꾸려 도성으로 향했다. 하지만 그의 꿈은 무너지고 말았다. 몸에 병이 도진 것이다. 결국 치세의 꿈을 펼치지 못하고 그렇게 스러져 갔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었지만 돌이킬 수 없는 것, 그의 아들 오명중은 시름의 나날이었다. 그 시름 참고서 아버지의 유업을 잇고자 했다. 후산 마을의 동쪽에 맑은 시냇물이 흐르는 곳에 상지와 하지 연못을 팠다. 계류를 타고 온 물이 옥반석 같은 바위에 부딪히며 내는 소리가 옥쟁반에 구슬이 구르는 소리 같고, 벼슬아치들이 관복에 메다는 패옥 같았다. 해서 그곳 암반과 연못 사이에 정자를 짓고 이름을 명옥헌이라고 했다. 그야말로 오희도의 온 삶을 담은 이름과 같았다. 오명중의 자는 이정이다.

 그는 또 연못 주변에 배롱나무와 솔, 동백, 매화를 심었다. 불꽃처럼 살다간 아버지를 기리는 뜻이었을까. 스스로 끊임없이 허물을 벗으며 하늘을 향해 화염을 내뿜는 나무의 성정을 아버지에 빗댄 것일까. 열흘 가는 꽃 없다는데, 백일이나 꽃을 올리는 백일홍나무를 심은 것이다. 그 나무들이 이룬 원형의 꽃대궐이 출사한 오희도를 대신하여 세상의 문무백관을 이곳 명옥헌으로 모아들이고 있는 것이 오늘 명옥헌의 현주소다. 

 가지 연못에 늘어뜨려 목 축이는 배롱 

 그런 곳인지라 명옥헌은 눈맛이 시원한 공간이다. 연못의 둔덕에서 바라보는 무등산의 산 그리메가 아름답고, 저 서쪽편으로 지는 노을이 아름답고, 가을이면 느티나무의 사각거리는 낙엽이 포근하고, 겨울이면 눈쌓인 연못이 황홀경을 선사한다. 다른 곳에 비해 봄의 명옥헌은 초라하다. 대신에 감의 주산지로 유명한 후산마을의 감나무가 터뜨리는 연초록은 전국 어느 곳에서도 보지 못하는 신선함을 선물한다. 그리고 지금 이 뜨거운 계절은 단연코 배롱나무다. 황지우 시인이 살았던 지금은 사라진 집으로 향한 곳의 배롱은 얼마나 목이 말랐는지 가지를 연못에 늘어 뜨리고 목을 축이고 있다. 영낙없는 봉황의 자태에서 나그네는 오희도의 분신과 같은 나무를 쓰다듬어 본다. 이렇게 꽃의 정열에 심취하고 정자의 주련과 현판에 눈길을 준다. “삼고”라는 편액이 주는 의미 앞에서 부르지 못해서 줄서는 오늘의 안달을 아쉬워 하며, 상지로 올라서면 거기 계류 사이 암반에 우암 송시열의 글을 다시 본다. “명옥헌 계축” 계축년에 우암은 오희도 선생을 추모하기 위해 글을 써 주었거나 찾았을 것이다. 그러고 보면 소쇄원의 제월당 편액이나 환벽당의 편액도 우암의 글씨이니 그는 필시 이곳 호남 사림의 본향인 창평을 거쳐 귀경을 했던 것이리라.

 눈이 호사를 한 다음, 명옥헌 이름을 다시 생각해 보며 눈을 감아 본다. 계류의 물소리 예전같지 않다. 명옥헌의 뒷켠으로 조성된 감나무 농원이 가져다 쓰는 물 탓이기도 하지만 우리도 물부족 국가인데, 당연히 물이 예전같지 않은 것이다. 그래도 암반을 흐르는 물소리 파릇하다. 또르르르. 귀로 보여지는 물의 행진에서 한 세상을 살아도 그 뜻을 펼칠 수 있는 순간을 기다릴 줄 아는 지혜를 폭염의 명옥헌에서 배워 본다. 나오는 길, 할머니들에게 옥수수 한 봉지 사들고 나온다. 다시 속세로 나오는 길이지만, 저 늙은 정원을 지켜주었던 고마움에 만분의 일도 안되더라도 말이다.

글·사진=전고필 여행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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