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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리자 (2015-09-24 14:24:14, Hit : 32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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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시황과 병마용③


[버스와 기차로 간 서역기행 ③]

사후 세계 두려웠던 황제, 7천 병사와 함께 잠들다

                                                  오마이뉴스/서종규(gamguk)

진시황릉 '병마용'. 말만 들어도 보고 싶었던 유물이다. 2200년 전 사람들의 차림새, 각각의 표정이 모두 다르다는 사실, 사람의 키 만 한 흙으로 빚은 병사들, 줄지어 늘어서 있는 병마용들의 위용, 네 마리 말이 끄는 전차... 국내 한 박물관에서 전시됐던 몇 개만으로도 감탄을 자아냈던 병마용, 그 현장을 본다는 기대가 가슴을 설레게 했다.

만평 규모의 진시황릉, 병마용의 위용은 대단했다

과연 대단한 위용이었다. 병마용을 보호하는 거대한 전시실 안에 들어서는 순간 숨이 막힐 정도의 설렘과 긴장감이 돌았다. 살아 있는 병사들이 사열을 받는 것 같은, 고대 군사들이 갑옷을 입고 창과 칼을 쥐고 서 있는 모습은 기대 만큼 장엄하다. 2200년 전 모습이 생생하게 눈앞에 살아 있는 것 같다.

그런데 나는 전시실 뒤쪽에서 깜짝 놀라고 말았다. 발굴을 위해 파놓은 아랫 부분에 부서진 병마용 조각들이 처참하게 흩어져 있는 것이다. 갑자기 당황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늘 머릿속으로 상상했던 병마용의 모습은 완전한 모양으로 줄지어 서 있는 것이었다. 이 병마용들의 조각들은 왜 흩어져 있을까? 언제 그랬을까?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1974년 한 농부에 의해 발견된 병마용은 온전한 것도 있지만 부서진 상태로 발견된 것이 많았다고 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늠름하고 당당하던 병사들이 부서진 상태로 땅에 묻혀 있다가 발굴된 것이 많다. 복원을 거쳐 우리 눈앞에 서 있는 것이다. 전시실 뒤쪽으로 가자 병사들이 서 있는 모습들이 어색하게 보이는데, 부서져 흩어진 것을 복원한 것들이다.

진시황이 죽고 나서 얼마 후 항우가 군사를 일으켜 진나라 수도인 함양을 점령하고, 군사들을 보내 진시황릉을 찾았으나 그 위치를 찾지 못했다고 한다. 그래서 흙을 쌓았던 사람을 찾아 그를 추궁해 그 위치를 찾았고, 무덤의 보물들과 각종 무기들을 모두 가져간 뒤 그곳을 불 지르고 파괴했다고 한다. 그래서 파괴된 병마용들이 흩어져 있다는 것이다.

서안에서 35km 떨어진 지점에서 발견된 진시황의 무덤은 약 만평 규모로 추정된다. 병마용은 대략 7000개 정도가 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는데 현재까지도 다 발굴하지 못했다고 한다. 발견 당시 진시황의 무덤을 발굴하다 많은 사람이 수은에 중독되는 사고가 발생했으며, 각종 부비트랩 등 위험 요소가 있을 가능성이 많다고 한다.

특히 병마용에는 채색되어 있는 것들이 많은데, 발굴해 상온에 놓아두면 색상이 바래기 때문에 완전한 발굴을 위한 기술이 생길 때까지 땅에 그대로 묻어 두었다고 한다. 현재는 발굴 현장을 거대한 지붕으로 씌워 병마용 박물관으로 만들어 놓았다.

박물관은 총 4개의 전시실로 되어 있다. 제1호관부터 제3호관까지는 병마용 발굴 현장이고, 제4호관은 병마용 박물관이다. 제1호관에는 전시 부대인 보병이 주로 배치돼 있고, 제2호관은 주력 부대로 화살병, 석공병, 기마병, 전차병들이 배치돼 있다. 제3호관에는 전쟁을 지휘하는 작전 부대가 배치되어 있다.

생생한 얼굴들, 그들의 삶이 느껴졌다

병마용은 무기, 갑옷, 신발 등 2200년 전 진나라 사람들의 삶의 모습을 잘 드러내고 있다. 인물들의 표정도 모두 다르다. 갑옷만 보아도 신분이 구분되고, 복장도 지위나 역할에 따라 달랐다고 한다. 신발 앞부리가 가장 높이 올라 온  것을 신고 있는 사람이 지위가 높았다고 한다.

발굴하다가 중단된 모습들을 보면 목이 없는 병사들도 많고, 칼이나 창을 쥐지 않은 병사들도 많다. 압권인 것은 지휘부에 있는 전차인데, 네 마리의 말이 끄는 전차에 올라타서 말을 모는 사람의 모습이다. 사진에서도 많이 봤지만 가까이서 보니 실전의 느낌이 그대로 살아 있었다.

채색된 병마용도 눈에 띤다. 특히 4전시실에는 복원된 병마용들이 그 모습대로 서 있다.  쿵후 동작을 하고 서 있는 병사, 앉아서 칼을 빼드는 모습, 말을 끄는 모습 등 서로 다른 모습이 실감 나게 표현돼 있다. 단연 주목을 끄는 것은 네 마리 말과 전차에 탄 사람의 모습이다. 전시된 병마용들은 유리로 보호돼 있는데 가장 가까이서 그들의 모습을 하나 하나 훑어 볼 수 있어 그들의 삶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이곳의 병마용 병사들은 모두 동쪽을 바라보고 있는데 진시황을 보호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한다. 이 무덤에서 뒤쪽인 서쪽으로 1.5km 떨어진 곳에 진시황릉이 있기 때문이다. 진시황은 재임 기간 20만 명 이상 많은 사람을 죽였다. 그래서인지 그는 사후 세계가 불안해 무덤 앞에 병마용 병사들을 배치해 자기를 지켜줄 것을 기대했다고 한다.

사람들은 진시황을 폭군이라고 생각한다. 전쟁에 동원한 수십만 명의 죽음, 만리장성을 쌓으려고 동원한 수십만 명의 고통... 호화로운 아방궁은 물론, 분서갱유(진시황제가 사상 통제를 위해 농서 등을 제외한 각종 서적들을 불태우고 수백 명의 유생을 생매장 한 사건- 위키백과) 등의 사건으로 진시황은 늘 악독한 지도자로 인식된다. 또 죽음을 피하기 위해 불로초를 구하는 사람들을 모았다는 전설도 있다. 항우에 의해 파괴된 아방궁은 현재 대략 위치는 알려졌지만 발굴하지 못했다고 한다.

여행에 동행한 김은경 선생님은 한 인간의 끝없는 욕망과 허망을 보았다며 "늘 꿈을 꾸었습니다. 서안에 가고 싶다고, 눈으로 보고 싶었습니다. 한 인간의 끝없는 욕망을, 그리고 허망함을, 하지만 한 인간의 위대함도 같이 보았습니다"라고 말했다.

중국 사람들의 진시황에 대한 평가는 그리 나쁘지 않은 것 같았다.  현지 가이드 오광현씨는 "진시황 이전에는 노예 제도가 있었죠. 말 한 마리와 노예 4명을 바꿀 정도로 노예의 인권이 무시됐다고 합니다. 진시황이 폭군이었다면 당시의 상황으로 봐서 노예들을 생매장했을 수도 있는데 진시황은 사람들을 생매장하지 않고 대신 병마용을 만들어 묻었어요. 진시황은 인간의 생명을 중요하게 생각했다고 볼 수도 있지요"라고 해석했다.

진시황은 상앙법을 제정해 노예 제도를 없애기도 했다고 한다. 중국을 통일한 진시황은 화폐, 도량형, 문자도 통일했다. 북방 오랑캐들의 침임을 막기 위해 만리장성을 쌓았고, 봉건제를 폐지하고 중앙 집권제인 군현제를 만들었다고 했다. 어쩌면 현재의 중국을 가능하게 한 진시황제. 이 인물에 대한 중국인의 평가는 대체로 너그럽다고 할 수 있겠다.

진시황은 7개로 나뉘어 있던 중국을 통일한 후 '황제'라는 칭호를 도입했다고 한다. 중국의 글자를 '한자(漢字)'라고 하는데 이것은 진나라가 중국 글자를 통일한 지 15년 만에 망한 후 통일된 중국 글자를 한나라에서 본격적으로 사용했기 때문에 '한자(漢字)'가 됐다고 한다.

진시황은 만리장성을 축조 중인 아들을 보러 가다가 죽었다고 한다. '지록위마(指鹿爲馬)' 고사로 유명한 환관 조고가 진시황의 죽음을 은폐하고, 그 아들에게 자결을 명하는 조서를 보내 죽게 한 뒤 정권을 잡았다. 이 후 곧 진나라가 멸망했다고 한다. 진나라 황궁은 현재 서안 함양 지역으로 서안 공항 부근이지만, 지금은 옥수수밭으로 옥수수만 무성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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